악녀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 '못된' 여자다. 남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한다는 말로는 모자란, 그야말로 속을 새까맣게 태우는 영화 속 여주인공들이 있다. '건축학개론'에서는 '쌍X'이란 거침없는 욕설까지 나왔었던 그녀다. 그래서 더욱 남자가 안쓰러워보였지만. 분명 못됐지만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영화 여자주인공들을 살펴봤다.
- '500일의 썸머' 주이 디샤넬
실제로 '내 여자친구'가, 아니면 '나의 썸녀'가 '썸머'같다란 남자들의 고민 상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2009년 개봉한 마크 웹 감독의 자전적 얘기를 담은 이 영화는 이미 요즘 시대 로맨틱코미디의 바이블이 됐다. 남자 주인공의 시선으로 썸머를 만나고 사귀고 잊기까지를 1일 부터 500일까지 그린 이 이야기 속 여자주인공 썸머는 끊임없이 남자를 애타게 만들고 헷갈리게 하고 미쳐 날뛰게 한다. 결혼은 생각이 없다는 그녀는 결국 마지막에 헤어진 연인 톰에게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라며 결혼 소식을 알린다.
- '위대한 개츠비' 캐리 멀리건
스콧 피츠제럴드 원작 영화 '위대한 개츠비' 속 데이지는 이미 여성 캐릭터계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개츠비를 기다리지 못하고 신분에 맞춰 결혼했던 그녀의 속물적 모습은 많은 남성들을 실망하게 만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츠비가 죽는 날까지 사랑한 유일한 여자가 이 데이지다.
데이지의 "딸이라 기뻐. 멍청했으면 좋겠어. 여자한텐 그게 세상에서 최고일 테니까. 예쁘고 어린 멍청이"란 대사는 유명하다. 2013년 바즈 루어만 연출작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캐리 멀리건이 각각 개츠비, 데이지 역할을 맡았다.
- '봄날은 간다' 이영애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말하는 남자에게 조금의 흥분도 없이 담담하게 '우리 헤어지자'를 말하던 '봄날은 간다'의 이영애는 그 새하얀 피부만큼 서늘했다. 2001년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 속 지방 방송국 라디오 PD 은수가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에게 던진 '라면 먹고 갈래요?'란 한마디는 이미 남심을 녹이는 필살의 유혹 한마디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진 두 사람 중 먼저 빠져나온 사람은 여자다. 봄을 지나 여름을 맞이하면서 삐걱거리고 이혼 경험이 있는 은수는 상우에게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부담스러운 표정을 내비친다. 은수를 잊지 못하는 상우가 은수의 새 남자 차에 남긴 스크래치에 공감하는 관객들이 많았다.
- '아내가 결혼했다' 손예진
보고 있으면 속이 터지고 눈물이 날 지경이란다. 손예진과 김주혁이 '정상적이지 않은' 부부로 첫 호흡을 맞췄던 영화다. 2008년 정윤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아내가 결혼했다' 속 주인아(손예진)는 귀여운 외모와 넘치는 애교, 헌책을 사랑하는 지적인 면모와 남자 못지 않은 축구에 대한 지식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 남자가 안 빠질 수 없는 매력의 그녀는 하지만 한 남자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란다. 수시로 휴대폰이 꺼져있고, 결혼을 했어도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없다는 그녀는 결국 두 집 살림을 한다. 하지만 도저히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런 그녀 옆을 가만히 지키는 것 뿐이다.
- '건축학개론' 수지
나왔다. 첫사랑의 그녀는 '쌍X'이 됐다. 수줍움 많던 건축학과 1학년 승민(이제훈)은 제주도 출신의 음대생 서연(수지)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그녀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질 뿐이다. 결국 그 남자에게 여자는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한 나쁜 여자가 되고 말았는데, 15년간이나 무려 쌍X'이 됐던 그 여자에게도 할 말이 있다.
이용주 감독의 2012년작인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이란 아련하고도 가슴아픈 단어를 새롭게 환기시킨 영화가 됐다. 영화 카피는 수지는, 그리고 한가인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 의견도 꽤 있었지만. / ncy@osen.co.kr
[사진] 각 영화 포스터, 스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