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름부터가 ‘주연’이다. 한 번도 대중의 관심에서 밀려나 본 적 없는 톱스타가 이번에는 임신 소동의 주인공이 됐다. 같은 구두도 일주일을 신지 못하는 변덕쟁이가 영원한 내 편이 필요하다며 아이를 갖겠다고 나선 것이다. 영화 ‘굿바이 싱글’은 이 철없는 배우의 폭탄 선언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대한민국에서 소위 ‘나이가 찬’ 남녀에게는 자연스레 결혼과 관련된 간섭이 따른다. 빠르게는 20대 중반부터 시작되는 주변의 오지랖에 숫제 명절이 두려워진다는 하소연이 줄을 잇는다. 짝 없는 ‘싱글’은 곧 연민의 대상이 된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을 일컬을 때 ‘비혼자’ 보다 ‘미혼자’라는 단어가 익숙한 것으로 보아,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 일은 인생에서 반드시 이뤄야만 할 과업으로 여겨지는 것이 분명하다.
겉으로는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굿바이 싱글’의 고주연(김혜수 분)이 가진 단 하나의 결함은 무려 마흔 둘이 되도록 미혼이라는 점이다. 뭇 사람들은 그의 화려함을 동경함과 동시에 ‘싱글’임을 동정한다. 여덟 살 연하의 신인배우와 열애 중이라는 사실에도 부러움 보다는 주책맞다는 쑥덕거림이 앞설 뿐이었다.
그럼에도 주연이 당당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날 때부터 멘탈이 튼튼해서가 아니었다. 늘 헌신적인 평생 친구 평구(마동석 분)와 고주연 앞에서 쩔쩔 매지만 가끔은 아버지처럼 쓴소리도 해 주는 소속사 김대표(김용건 분), 매니저 미래(황미영 분)이 가족처럼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던 덕이 크다. 그러나 평구는 애 셋 딸린 유부남이고, 김대표와 미래도 각자의 사정이 있다. 언제나 주연이 ‘1번’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하의 연인 지훈(곽시양 분)이 한참 어린 여자와 바람이 났다는 사실은 인생 최대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생각해 보면 주연의 인생에 온전한 ‘내 것’은 없었다. ‘협찬’으로 그득한 텅 빈 집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면 평구의 가족들과 소속사 식구들을 불러 식사를 대접하곤 하지만, 주연을 비롯한 모두는 그 자리에 미세하게 나 있는 빈틈을 알고 있다.
남자는 배신해도 자식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는지, 주연의 선택은 결혼이 아닌 임신이었다. 미혼모보다는 싱글이 낫다는 주변의 강력한 반대에도 주연은 산부인과를 찾는다. 그러나 그는 이미 폐경이 왔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실의에 빠져 있던 주연은 인공 유산을 하러 병원을 찾은 중학생 단지(김현수 분)와 만나고, 그의 아이를 대신 키우기로 마음 먹었다. 주연은 단지가 출산할 때까지 그와 한 집에 살며 임신한 척을 하기로 하면서 기괴한 동거가 시작됐다.
아직도 철이 덜 든 40대의 배우와 좀 더 일찍 성숙한 중학생이 한 집에서 티격태격하며 살아가는 광경은 의외로 흥미진진했다.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남편 없고 자식 없다는 이유로 무시 당하고, 꿈도 재능도 있지만 아이를 배는 바람에 책 잡힌 채 살아야 하는 두 여성은 뻔하지만 자연스럽게 마음을 나눈다. 그러면서 단지가 주연을 부르는 호칭도 건조하기 짝이 없는 ‘주연님’에서 ‘언니’로 바뀌어 간다. 스스로는 결핍이라 느끼지 않더라도, 끊임 없이 부족한 것으로 여기도록 강요받는 개인의 특징들이 주연과 단지에게는 결속의 힘이 된 것이다.
‘굿바이 싱글’보다 다소 묵직한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일본 드라마 ‘라스트 프렌즈’에도 이 같은 관계가 등장한다. 작품 속 지우기 힘든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네 남녀는 한 집을 나눠 쓰게 되는데, 이들은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서로를 통해 치유한다. 완벽히 화목한 가정에 요구되곤 하는 번듯한 선남선녀와 그 사이에서 생긴 아이가 없더라도 극 중 인물들은 나름의 행복을 찾았다. ‘라스트 프렌즈’는 결혼으로 맺어지지 않더라도 영위할 수 있는 충만한 삶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굿바이 싱글’과 유사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굿바이 싱글’에도 맹점은 있다. 먼저 주연이 산부인과 의사 덕수(안재홍 분)로부터 폐경 통보를 듣는 대목을 보자. 이때 주연의 나이는 42세인데, 대한민국 여성의 평균적 폐경 연령은 약 49세다. 흔치 않은 케이스임에도 주연과 주변인들은 그의 신체에 일어난 변화를 너무도 담담히 받아들인 채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가만히 있어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현대 사회에 연예인으로 활동하는 주연이다 보니 조기 폐경이 왔다 해도, 여성으로서 맞는 인생의 거대한 전환점 중 하나가 몹시 가볍게 다뤄진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주연은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입양도 아닌 임산부 행세를 할 정도로 대책이 없었던 걸까. 주연과 단지의 해피엔딩이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이었다는 점도 다소 안타깝다.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굿바이 싱글’은 코미디 영화로서의 미덕을 유감 없이 뽐낸다. 입술 성형 때문에 아이스크림 한 숟갈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모습에 화장기 없는 얼굴, 막춤까지 불사한 김혜수의 열연은 물론이고 우락부락한 근육을 주연의 앞치마 매는 데 쓰는 마동석의 연기도 웃음을 안긴다. 돈 떄문에 주연 옆에 있는 것 같이 보여도 누구 못지 않게 그를 챙기는 소속사 식구들이 보여 주는 ‘케미’ 역시 훈훈하다. 특히 단지 역을 맡은 김현수가 돋보인다. 16세 여자 중학생이 덜컥 임신을 했을 때 겪는 불안감과 유일한 가족 언니로부터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 그럼에도 강한 척을 할 수밖에 없는 모습까지 섬세하게 연기해냈다. ‘굿바이 싱글’은 이들의 찰떡 같은 호흡과 터져 나오는 폭소에 생각할 틈 없이 보다가도, 영화가 끝나갈 즈음에는 또 다른 가족의 형태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굿바이 싱글’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