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지 앤더슨 감독의 1968년작 ‘만약에(If…)’는 영국의 한 공립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기성 제도를 풍자했다. 교사들은 훈육이라는 미명 하에 과도한 폭력과 규율로 모두를 ‘당연히’ 통제하고, 그 공고했던 교권을 일부 이양받은 선도부 격의 학생들은 어른 흉내를 내며 서슴없이 회초리를 들었다. 자유를 갈구하는 주인공 트래비스(말콤 맥도웰 분)는 기숙사에서 자행되는 모든 구속에 저항한다. 언뜻 장 비고의 ‘품행제로’를 연상케도 하는 이 작품은 트래비스와 동료들이 억압자에게 가하는 총격전을 통해 전복의 통쾌함을 선사했다.
영화의 작품성을 미뤄두자면, ‘만약에’가 오늘날에도 격한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작금의 학교에 저항할 만한 권위가 남아있지 않은 탓이다. 귀밑 3cm였던 두발 규정이 7cm로만 바뀌어도 엄청난 투쟁에 성공한 양 들떴던 분위기는 더 이상 없다. 자연히 영화계가 학생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었고, 괜찮은 학생 이야기는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열혈 교사는 딴 세상 소리인 데다가 학교라는 ‘공공의 적’의 힘이 미약해진 지금, 시련조차 삭막해졌다. ‘파수꾼’이나 ‘우리들’ 처럼 관계에 집중하는 걸작들이 좋은 학원물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지만, 여전히 입체적인 학생 캐릭터와 이야기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싱 스트리트’와 ‘나의 소녀시대’이 극장가에서 일으키고 있는 돌풍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두 작품 속 인물들의 주적은 학교다. ‘싱 스트리트’는 매번 비슷하더라도 늘 설레는 첫사랑 이야기와 음악을 버무린 가운데 가톨릭 학교의 엄격한 규율 때문에 탄압 당하는 코너(페리다 월시-필로)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나의 소녀시대’ 역시 서태우(왕대륙 분)를 필두로 학생들이 강압적인 교권에 맞서는 장면을 클라이막스에 배치했다. 이는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도 마찬가지다.
각각 1980년대와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들에서는 억압의 향수가 느껴진다. 어떤 집단을 연대하게 하는 데는 외부의 억압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싱 스트리트’와 ‘나의 소녀시대’에서는 학교가 이러한 역할을 한다. 두 영화에서 학교를 들어낸다면 내러티브는 급속히 범지구적으로 바뀔 터다. 평범한 외모를 가졌거나 짝이 없는 자신 안으로 침잠하는 고민은 학생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이야기는 시계를 거꾸로 돌리지 않고는 공감을 자아내기 힘들다.
‘맞을 짓은 없다’는 말은 얼마 전만 해도 대단히 진보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명제가 문자 그대로나마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는 분위기는 분명 그리 오래지 않았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다양한 모양의 몽둥이를 휘둘렀고, 간혹 주먹 세례와 발길질이 쏟아질 때도 있었다. 그 당시 학교의 ‘공포 정치’는 학생들을 통제하는데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폭력은 학습됐고 누군가는 그 고리를 끊어야만 했다.
그러나 교육계가 내세운 진보는 몹시 급했다. 적절한 대안 없이 ‘사랑의 매’가 사라졌고, 교육 현장에서는 반성문조차 인권 침해로 치부된다. 최소한의 권위조차 갖지 못한 교사들은 학생들에게조차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무원’ 취급을 당한다. 노동 3권 역시 교사들의 것은 아니다. 숫제 학교가 ‘공공의 적’이던 시절, 400번을 구타당하고 천번을 흔들렸을 때 어른다운 어른이 된다는 망발마저 그리워질 지경이다.
물론 ‘사랑의 매’ 따위가 부활할 필요도, 다시금 학교가 학생들의 주적이 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억압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환경은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건강한 이야기는 건강한 환경에서 나온다. 바뀐 시대를 반영하면서도 재미있는 ‘학생 이야기’를 위해, 이제 무언가는 바뀌어야 함이 분명하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싱 스트리트’, ‘나의 소녀시대’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