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유진모의 취중한담]사회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남성에 대해선 비교적 간단한 ‘늙으나 젊으나 늑대’ 등으로 표현되지만 여성에 대해선 무척 복잡하다. ‘여성의 적은 여자’라는 아이러니한 공식까지 나올 정도로 여성에 대해 남성은 당연하고 같은 여자조차도 잘 모르겠다는 개념이 통용된다.
그래서 영화 ‘비밀은 없다’(이경미 감독, CJ엔터테인먼트 배급)에서 손예진(34)이 그려내는 연홍이란 캐릭터는 이 사회에, 남녀 모든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하다. 이해가 안 되는 듯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기시감을 주는 친근한 인물이고, 16년 된 이 베테랑 배우는 가공의 창조물을 실재하는 사실감을 주는 애절한 한 여자로 훌륭하게 완성해냈다.
무대는 국회의원 선거 투표가 보름 남은 경상도의 가상 도시. 중3 외동딸 민진을 둔 연홍은 방송사 아나운서 출신의 여당 후보인 남편 종찬(김주혁)의 선거운동을 돕느라 정신이 없다. 그 와중에 민진은 친구 다혜의 집에서 저녁 늦게까지 공부하고 오겠다며 다혜의 전화번호를 남긴 채 늦게 집에서 나간다.
늦은 밤 선거운동을 마치고 집에 들어온 연홍은 민진이 안 들어온 것을 보고 다혜에게 전화를 걸지만 다혜는 가공의 인물이었고 전화 속 주인공은 엉뚱한 서울 사람이었다. 사태가 심상찮은 것을 감지한 연홍은 종찬과 종찬의 측근들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들은 선거에 좋지 않은 영향이 끼칠 것을 우려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그렇게 연홍과 종찬의 사이엔 금이 가기 시작한다.
실종 혹은 유괴된 자식을 찾는 부모 얘기가 영화에서 다뤄진 건 많았지만 연홍의 캐릭터와 이 영화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보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연홍과 민진과 종찬은 이 사회의 숨기고 싶지만 엄연한 사실인 실제상황이다.
경상도 신도시의 여당후보의 아내가 알고 보니 전라도 여자였다. 종찬의 경쟁자인 늙은 여우 같은 노재순 후보는 이 점을 물고 늘어져 우위를 점한다. 민진의 실종 사실이 알려지자 이번엔 민진이 불량소녀였음을 SNS를 통해 알아내고 이 점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종찬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간다.
그럴수록 종찬은 더욱 침착해지고 연홍은 점점 더 미쳐간다. 여당 국회의원 후보의 부인인 만큼 어느 정도의 권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워낙 이 도시에서 오래 국회의원을 해온 재순의 텃세에 번번이 부닥친다.
그러자 오랫동안 재순의 오른팔로 일하다가 이번 캠프 때 종찬의 참모로 변절한 사무국장에게 재순의 측근을 통해 경찰의 민진 수사기록을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사무국장은 불법이라며 이를 거부하고, 연홍은 가위로 자신의 손등을 찍으며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런 무식하리만치 무모한 연홍의 과속질주는 학교와 경찰서를 가리지 않고 좌충우돌 이어진다. 그 와중에 재순의 열혈 지지자로부터 테러를 당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지만 그녀 몰래 종찬이 붙여준 보디가드에 의해 간신히 구출된다. 어쩌면 이 땅의 수많은 아내들은 남편의 감시아래 있을지도 모름을 암시한다. 정작 감시를 당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렇다. 미친 건 연홍이 아니라 이 사회고 정치판이고 기성세대였다. 재순 측에서 연홍이 전라도 출신이란 것을 널리 알리자 여당 측 원로들은 ‘왜 그걸 숨겼냐’고 연홍을 핍박한다.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정치인 혹은 정치인의 아내가 특정 지역 출신이란 걸 굳이 밝혀야 하는 게 정치판의 현실이냐’는 질문과, ‘만약 그렇더라도 전라도가 뭐 어때서’라는 항변이다.
연홍은 무식한 여자다. 무속인 여고 동창은 연홍을 ‘힐러리 클린턴을 꿈꾸던 무모한 철부지’로 기억하고 있다. 무식하고 무모한 여자, 주제를 모른 채 세속적이고 천박하며 황당한 꿈을 꿨던 비현실적인 청소년이었던 게 10대 시절의 연홍이었고, 그건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찬의 선거유세에서 경망스러운 춤을 췄던 연홍은 민진의 실종 이후 180도 달라진다. 운전을 하며 그녀는 ‘생각하자, 침착하자’를 되뇌며 혼돈스러운 이 세상에서 무식한 것은 죄가 아니지만 음험하고 탐욕스러운 것은 아무리 유식해도 죄라고 교훈을 던진다.
종찬은 언론인으로서의 반듯한 이미지와 더불어 대중적인 인기까지 얻어 그 힘을 발판으로 유력 정치인을 제치고 하루아침에 여당 후보로 선출됐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나라건 존재할 두 얼굴의 정치인의 표상이었다. 밖에선 도덕과 청렴의 상징이지만 집에 들어오면 그는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며 탐욕적인 남편이었다.
연홍은 이제 남편의 출세와 그로 인한 특혜 따윈 관심 없고 오로지 딸의 안위에만 모든 걸 걸지만 종찬은 연홍과 민진보다 출세가 우선이다. 종찬은 자신을 의심하는 연홍의 뺨을 때린다.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는 여당 국회의원 후보라니! 밖에선 그렇게 부드럽고 정의롭게 행동하는 그는 폭력 가장이었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연홍은 그냥 맞고도 참고 사는 수동적인 아내였을 것이다. 그러나 민진이 사라진 지금은 달랐다. 그 뺨을 세 대로 돌려준 것도 모자라 얼굴에 침까지 뱉는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자는 게 아니라 당하고만 살지 말자는, 여자도 주체적 독립적 주도적으로 우뚝 서자는 독립과 혁명의 선언이다.
이건 남편을 권력자로 만듦으로써 자신도 권력을 쥐려 했던 천박하고 탐욕스러웠던 다수 여자들에 대한 자아의식의 깨우침인 계도다. 더불어 여자를 성의 도구로, 아내를 그것과 더불어 자식을 낳아주고 밥상이나 차려주는 기계로 인식해온 보수적인 남자들에 대한 경고다.
이런 캐릭터를 창조한 사람은 감독이지만 완성의 방점을 찍은 주인공은 역시 손예진이다. 16년 전 영화 ‘비밀’의 조연으로 연기생활을 시작한 손예진은 ‘비밀’의 여주인공 윤미조가 슬그머니 무대에서 사라진 뒤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올라와 ‘비밀은 없다’를 통해 미모 연기력 캐릭터소화력까지 골고루 갖춘 최상의 여배우로 진화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연홍은 색깔이 불분명한 캐릭터다. 아니, 극과 극의 개성을 담은 다중인격적인 인물이다. 전라도 사투리를 안으로 삼키며 태연하게 서울말씨를 쓸 때의 연홍은 오로지 출세지향적인 세속적인 속물이다. 별로 애틋한 관계가 아닌 게 뻔한 종찬과 통깨가 쏟아지는 듯한 부부사이로 포장하며 스스로 그 마취에 취해가는 이유는 오로지 권력을 향한 욕심 때문이다. 한국의 힐러리가 되겠다는.
그건 조선 고려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인권평등의 현대 자유민주주의정신에 위배되는 신분상승의 어두운 욕망이다. 대표적인 유럽의 복지국가이자 인권평등국가인 덴마크에서 국회의원은 특권이 별로 없는 봉사직이다. 감독은 국회의원이란 게 국민보다 위 등급의 양반이 아니라 국민의 심부름꾼일 따름이고 그것마저도 일정기간밖에 일할 수 없다는 것을 연홍이란 캐릭터로 웅변하고자 했고, 손예진은 복잡한 다중인격으로 훌륭하게 완성해내며 그 의도를 충족시키다 못해 넘어선 진화를 이뤘다.
현재 극장가에서 ‘비밀은 없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인디펜스 데이: 리써전스’에 뒤져있지만 손예진에 대한 극찬은 줄을 잇고 있다. 한석봉은 붓을 안 가렸지만 현대의 작가에게 훌륭한 배우는 ‘필수충분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