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라는 발명품은 참 편리하다. 굉장히 간단하고 직관적인 방법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가 있다. 이를테면 많은 사람들이 산 물건은 좋은 것으로 취급되고, 자산이 많은 사람은 영웅으로 평가되곤 한다. 특히나 물화(物化)된 숫자인 돈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수는 곧 권력이 된다. 팔로워를 많이 거느린 SNS 이용자의 별칭에 ‘파워’가 붙는 사실만 봐도 알 만하다. 조회수가 많은 기사, 시청률이 높은 방송 프로그램이 그 품질과 관련 없이 영향력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다다익선’이라는 말도 있듯, 인간의 역사 속에서 보다 많은 것은 대부분 좋은 것이었다. 때문에 이러한 현상들이 몹시 별나지는 않다. 문제는 숫자가 돈의 힘을 등에 업고 절대적 권능을 갖게 된 후, 전 세계가 이에 집착하는 방향으로 매우 급속하게 움직이는 중이라는 점이다. 가치의 균형이 무너진 지는 이미 오래고, 현실은 누군가가 믿고 싶어할 법한 모습으로 꾸며진 가상으로 치환되고 있다.
영화 ‘트릭’을 지배하는 숫자는 시청률이다. 물론 여기에도 시청률이 높을 수록 돈을 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다큐멘터리계의 스타로 불리며 승승장구하던 PD 석진(이정진 분)은 ‘쓰레기 만두’ 사건을 보도하며 온 나라에 파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것이 오보였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관련 식품회사의 사장이 자살을 하며 석진은 방송가에서 매장된다.
하지만 어떤 도덕적 가치도 개입되지 않는다고 할 때, 시청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노하우는 그 자체로 독보적 기술이다. 그래서 석진은 다시 방송국의 부름을 받는다. 시한부 환자와 그를 돌보는 부인의 일상을 담은 휴먼 다큐멘터리로 전 국민이라는 대어를 낚아 보자는 제안이 그에게 주어졌다. 자신의 치명적 약점을 은폐하려는 방송국 사장, 화려한 복귀를 하고픈 석진, 돈과 관심이 필요한 암 환자의 아내 영애(강예원 분)까지 시청률 하나에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힌 가운데 이들은 손을 잡는다.
이야기는 진짜 현실과 인위적으로 연출된 가상의 경계는 매우 흐릿한 채로 진행된다. 숫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조작인지부터 모호하다. 시한부 환자 도준(김태훈 분)과 그의 아내 영애가 처음 석진의 카메라 앞에 섰을 때, 이들은 실제 부부가 아니라 연기를 위해 모인 배우처럼 보인다. 주어진 대본대로 움직이다가도 돌연 상황을 박살내고 현실로 복귀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대체 어디까지가 참인지에 대한 혼돈을 준다.
극 중 석진을 연기한 이정진은 최근 열린 ‘트릭’ 기자간담회에서 “우리가 살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남이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세상이, 남이 좋아하는 것을 하게 된다”며 자신이 맡은 캐릭터가 조작 방송을 진두지휘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설명했다. 진짜 자신의 모습과 대본으로 연출된, 시청자들이 바라는 모습 사이에서 끊임 없이 갈등하는 부부의 고뇌는 결국 시청률이라는 족쇄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석진의 위험한 연출은 점점 강도를 더해 가고, 시청률은 이에 비례해 상승하며, 영애의 화장은 더욱 짙어졌고, 도준의 마음은 점점 비어만 간다.
이 영화가 비판하는 지점은 비단 숫자에 매몰돼 버린 극 중 인물들만이 아니다. 이창열 감독은 ‘트릭’을 통해 ‘쓰레기 만두’ 오보를 철썩 같이 믿고 여론을 형성하다가도 이것이 거짓임이 판명됐을 때 석진을 내치고, 다시 비판 의식 없이 그를 받아 들이는 대중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불륜에 성추문까지 가미된 미담은 확실히 즉각적인 자극으로 보는 이들의 판단력을 흐리지만, 수용자들에게도 이를 걸러 볼 수 있는 판단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방송 환경은 급변했고, 이전보다 훨씬 많아진 콘텐츠들은 숫자를 올리기 위해 알맹이 없이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이야기들만을 늘어놓기 때문이다.
‘트릭’은 예상된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기-승-전까지 관객들을 몰아치던 ‘트릭’의 결말은 아쉽게도 촘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숫자가 지배하는 세상에 태어난 괴물을 관습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이를 생산자와 수용자가 공모한 상황으로 그려낸 성과는 분명하다.
‘피에타’ 이후 4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하는 이정진의 연기는 단연 돋보인다. 능청스럽게 욕망을 드러내는 얼굴과 동요 없이 모든 상황을 컨트롤하는 카리스마는 극의 빈 공간을 메웠다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트릭’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