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3일 개봉한 영화 '비밀은 없다'는 비운의 수작을 넘어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할 만 하다. 단 24만여명(영진위)의 관객을 모으는 데 그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훗날 좀 더 정확히 되리라 확신한다. 이경미 감독의 유니크한 추격 스릴러는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지는 못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인생작이 될 만 하다. 그리고 손예진이란 배우의 가치를 다시한 번 일깨워줬다.
국회입성을 노리는 앵커 출신 정치인 종찬(김주혁)과 그의 아내 연홍(손예진). 선거를 보름 앞둔 어느 날, 그들의 딸이 실종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비밀은 없다'는 확실히 흥행으로만 재단하기에는 아까운 영화다.
모든 장르는 삐그덕거리고 스토리는 눈 앞에서 달아난다. 캐릭터는 예측 불가의 힘으로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한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예상 외 전개에 관객들이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 끈질기게 달라붙어 가는 것에는 물론 이경미 감독 특유의 연출적 매력도 이유가 되지만 손예진이 큰 역할을 한다.
극 중 손예진이 분한 연홍은 한 마디로 아이를 잃은 엄마다. 그 자식은 어린이가 아닌 사춘기 여중생이다. 이 성장한 아이의 엄마를 손예진이 연기한다는 자체가 일면 놀랍다. 절절 끓는 광기에 휩싸인 모성을 결혼도 하지 않은 그가 어떻게 소화해낼 수 있을까.
여기에는 연홍에게 오리지널 타입의 엄마의 모습이 아닌, 여중생의 감성 비슷한 모습이 있기에 가능하다. 자식을 잃은 엄마가 이성적일 수는 없겠지만, 연홍은 더욱 성숙한 모습의 엄마 대신 지옥불에라도 떨어질 수 있을 것만 같은 미친 신경질적인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투표장에서 카메라 앞에 서서 온화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연홍이지만, 그는 남편 캠프의 사무국장 앞에서 손을 자해하며 딸의 경찰수사기록을 입수하라고 협박한다. 눈은 뻘겋게 충혈돼 있고 머리는 헝클어졌으며 입에서는 순간순간 날 것의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다짜고짜 "내 새끼 죽였냐"라고 말하는 연홍에게는 투명하게 대담하지만, 상처받고 방황하는 딸의 모습과 하나가 된 엄마의 모습이 녹아 있다. 공허한 눈빛으로 분노를 담았다. 이런 연홍을 두고 이경미 감독의 전작인 '미쓰 홍당무'의 주인공 양미숙의 엄마 버전이라고도 하는데, 손예진이 가진 미녀의 아우라가 아름다운 소름을 더한다.
추리극이라는 큰 틀 안에서 한 순간 병맛 코드의 웃음을, 또 한 순간 머리를 때리는 잔인성을 보여주기도 하는 이 영화 속 연흥이 한국영화계에서 전에 없던 여성 캐릭터라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엄마, 아내, 사모님, 살인자, 탐정..정제되지 않아 매력적인 이 모든 입체적인 캐릭터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가치가 있다.
그리고 '비밀의 없다'의 손예진을 보니 그가 앞으로 보여줄 '덕혜옹주'가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다. / nyc@osen.co.kr
[사진] '비밀은 없다' 스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