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유진모의 취중한담]MBC 수목드라마 ‘W’가 2주차에 경쟁드라마 KBS2 ‘함부로 애틋하게’를 제치고 시청률 1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동시간대 유일한 두 자리 수 시청률을 올리고 있다. 시청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볼 때 20%대 진입도 가시권이다.
결론부터 내리자면 이 드라마는 요즘 유행하는 트렌드를 따르고(장르의 퓨전화), 지금까지 죽 있어왔던 클리셰를 그대로 가져왔으며(로맨틱코미디), 젊은 세대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했지만(‘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 결론적으론 매우 신선하다는 게 결정적인 강점이다.
결국 온고지신의 기초공사가 훌륭한 최신건축양식을 완성한 셈이다.
드라마는 ‘극 중 극’의 형태로 판타지에 액션 미스터리 로맨틱코미디 등을 버무려 젊은 층은 물론 다양한 계층의 시청자들에게 어필하는 변별성을 갖췄다. 종합병원 흉부외과 레지던트 2년차 오연주(한효주)가 사는 세상은 로맨틱코미디고, 연주의 아버지 성무(김의성)가 인기리에 연재 중인 웹툰 ‘W’의 주인공 강철(이종석)이 이끄는 만화 속 세계는 미스터리액션이다.
철을 히어로로서 창조했지만 왠지 그를 죽이려는 성무의 속사정과, 만화 속에서 철의 일가족 4명을 살해한 의문의 인물을 좇는 과정은 미스터리스릴러다. 이 아니 재미있을 수 있을까?
상황이 이렇다보니 곳곳에 시청자들이 궁금해 미칠 지경인 요소들이 포진돼있다. 어떻게 만화 속 세상이 진짜와 똑같은지, 연주와 철은 어떻게 서로의 세계를 오갈 수 있는지, W의 일주일이 현실의 30분에 불과한 이유는 뭔지, 그래서 결말이 어떻게 나올지-예를 들면 연주의 세계마저 그림 또는 환상의 세계인지, 아니면 두 세계가 사실은 반대의 세상이었는지 등-가 드라마를 둘러싸면서도 관통하는 최고의 관심사다.
디테일로 들어가면 역시 가장 큰 의문은 철의 일가족 살인범이 진짜 철인지, 아니면 다른 진범이 있는지다. 범인이 철이어도 그렇고 다른 사람이라도 그렇겠지만 그게 드러나면 자연스레 살인의 동기가 시청자들의 애간장을 태울 것이다.
그 다음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게 역력한 성무가 간직한 비밀이다. 연주는 W의 세계로 들어가 궁금한 것투성인데 성무는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연주 역시 그런 성무의 속셈은 몰라도 최소한 알면서 시치미를 뗀다는 것은 인지하면서도 속아준다. 이런 성무의 은폐 속에는 철은 물론 W, 그리고 그들 사이의 숨기고 싶었던 충격적인 사실이 감춰져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알고 보니 성무가 W 출신의 인물이라는 반전의 가능성도 존재한다.
멜로라인은 철을 둘러싼 연주와 윤소희(정유진)의 삼각관계다. 소희는 철의 고교동창이자 현재의 최측근 비서다. 도도함과 섹시함을 두루 갖춘 그녀는 철을 향해 일방적인 애정과 우정을 쏟아 붓지만 바람기 많은 철은 “내 인생의 키를 만났다”며 처음 본 연주에게 각별한 태도를 보여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세 사람의 물고 물리는 트라이앵글은 숱한 드라마에서 지겹게 봐온 구조다. 철은 잘생기고 돈 많은 ‘아이언 맨’의 토니 스타크 같은 인물이고, 소희는 페퍼 포츠(기네스 펠트로)와 유사하지만 그녀에 비해 차갑고 날카로운 성향이 더 강하다. 연주는 지도교수에게 매번 핀잔만 듣는, 간신히 의대에 합격한 무능력자다. 덜렁거리는 성격에 다소 보이시한 행동을 보이지만 알고 보니 잠재력이 큰 의사였다는 설정이 벌써부터 엿보이는 무협지 같은 상투적인 주인공 캐릭터의 전형이다.
만화가 다른 차원에 엄연히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이란 설정만 빼곤 이렇게 모든 게 식상한 것은 맞다. 철이 그렇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스포츠스타지만 그 권총으로 존속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은 끝에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긴 하지만 사회의 따가운 시선까지 이겨낼 순 없어 자살까지 시도한 사회적 낙오자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젊은 재벌이 돼 등장한다. 강력한 의지와 올곧은 심성에 꽃다운 외모와 뛰어난 패션감각까지 갖춘 부자다. 모든 여성들이 꿈꾸는 완벽한 조건의 ‘백마 탄 왕자’다.
여기에 비하면 연주는 ‘개나 소나 모두 갖춘 미모’가 고작이다. 가난한 만화가 아버지 때문에 갖은 고생을 한 엄마가 자신이 의대에 합격하자마자 아버지와 이혼한 뒤 엄마와 둘이 살아온 그녀에게 가난은 익숙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혼 후 비로소 만화가로서 빛을 보기 시작한 아버지는 현재 수십억 원의 인세를 챙기는 부자가 됐지만 그건 그녀의 재산은 아니다. 다만 아버지의 유명세 덕에 자신을 괴롭히던 담당교수로부터 환대를 받는 게 그녀가 누리는 혜택의 전부다.
누가 봐도 연주는 소희에게 상대가 안 된다. 그런데 철은 소희를 ‘소 닭 보듯’하고 연주에게 푹 빠졌다. 누가 봐도 ‘신데렐라’ 아류다.
이렇게 진부한데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신선하다고 아우성이다. 그 근거는 지난주 필자가 주장한 이 드라마의 기획의 시작이 ‘만찢남’에서 비롯됐다는 추론과 더불어 철의 대사에 자주 등장하는 ‘맥락’에 있다.
‘만찢남’이란 신조어는 10~20대 사이에서 수년 전부터 유행되기 시작했다. 만화 속에서 나온 남자니 바로 ‘백마 탄 왕자’다. 당연히 비현실이다. 여자들이 이런 환상 속의 남자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척박한 현실 탓이다. 잘생긴 남자도, 돈 많은 남자도, 심지어는 볼품없는 남자조차도 모두 한결같이 미녀만 찾는다. 그러나 미녀는 소수다. 다수의 여자들은 그래서 남편이나 남자친구가 있어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그렇지 않은 적지 않은 여자들은 외롭다. 그들은 연예인을 흠모하거나 그것도 모자라 ‘만찢남’을 갈구한다. 그들은 안다. 그게 이뤄질 수 없는 허구라는 걸. 소외와 상실이 판타지를 유행시키고 ‘만찢남’을 창조했다.
그런 배경으로 민폐 캐릭터 연주에게 철이 첫눈에 반하게 만드는 설정에 열광하고, 만화가 아닌 만화 속에서 살아나온 진짜 사람이라는 데서 판타지의 실현이라는 또 다른 판타지에 푹 빠지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은 “광기가 이성의 결핍에 이른 게 아니라 일종의 과잉상태인 한 결코 이성을 상실한 게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만찢남’에 대한 그리움과 그에 대한 과대망상이 그렇다.
혈관의 연결계통인 맥락은 ‘서로 이어져있는 연관관계’를 의미한다. 만화와 현실, 현실의 가난한 여자와 만화 속의 재벌 미남, 자신을 창조주라 여기며 또 다른 세계의 창조주에 가까운 철을 죽이려는 성무와 그에 대항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철, 이 모두는 결코 연결된 혈관이 아니지만 판타지라는 수단에 의해 나중에 모두 하나의 맥락으로 만날 것이다. 그게 이 드라마의 각 캐릭터와 시퀀스를 잇는 맥락이자 신선한 충격이 주는 매력이다.
몬스터SF ‘에일리언’ 시리즈가 걸작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바로 정체성의 혼란, 즉 소외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도 ‘Alien’(외계인)이다. 소외를 뜻하는 Alienation은 ‘외국의’ ‘무관한’이란 뜻의 라틴어 Alienus(알리에누스)에서 비롯됐다. 연주의 세계로 들어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철은 W라는 또 다른 외계에서 온 이방인이다./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
<사진> MBC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