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의 이야기를 시작하면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는 배우 손예진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그가 덕혜옹주 역을 맡은 것은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클래식'을 보고 나서도, 최루성 멜로인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던 손예진이다. 영화의 촬영이 끝난 직후에는 감정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어 눈물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덕혜옹주'는 그런 눈물과 달랐다. 자신의 영화였지만 영화가 너무 슬퍼서 눈물을 뚝뚝 흘릴 수밖에 없었다.
"홍보를 앞두고 조금씩 찍었던 영상과 예고편들을 처음 보는 거였어요. 짤막한 메이킹, 그런 영상을 보는데 되게 울컥했어요. 진짜 잘 안 그러는 성격인데..해일 오빠는 그래서 영화 볼 때 걱정이라고 하더라고요. 되게 많이 울 것 같다고. 모르겠어요. 왜 자꾸 그런 감정이 뒤늦게 올라오는지. 어제도 보면서 보통 전 제 영화를 정말 냉철하게 보는 편이에요. 스스로 만족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보면서 몰입을 잘 못하죠. '왜 저랬지?' 하면서요. 그런데 저 어제는 잘 기억이 잘 안나요. 관객처럼 앉아서 이러고 봤어요. 나에게는 처음 있는 경험이에요."
어쩌면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여운이 깊은 허진호 감독 특유의 감성 때문인지도 몰랐다. 손예진은 "역사적인, 다른 지점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첫 등장이 보통 저는 처음으로 등장해 끝까지 나오는 역할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어제는 덕혜옹주의 삶을 그린 영화라 사실과 다를 수 있다. 거기서부터 뭔가 이상하더라고요. 약간 '안 되겠다'이랬는데.. 중간에 사진들이 들어가고 자막 같은 게 들어가고 고종 황제 승하한 장면이 나오고 다큐 같은 느낌이 들어가다보니 장한(박해일 분)의 시점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덕혜옹주'는) 제가 영화 초반에 안 나오잖아요. 아역들의 연기가 나오는데 거기에 빠져서 보게 됐어요. 마지막엔 제가 어떻게 연기하고 있는지 잘 모를 정도로 울었죠.(웃음) 보통 자기가 자기 영화 보면서 우는 배우들을 이해 못햇고 전 정말 안 그러는 사람인데.."
그러고 보면 손예진과 '덕혜옹주'는 여러모로 인연이었다. 손예진은 이 이야기가 소설로 나왔을 때부터 영화화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마침 영화 '외출'로 한 차례 작품을 같이 한 허진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게 됐다. 허 감독이 영화화한다는 뉴스를 보면서 손예진은 "누가 할까?" 궁금했다고 한다. 탐나는 역할이었다.
"제가 성격상 그렇게 적극적으로 감독님께 연락하지 않아요. 영화가 그 뒤로도 제작이 되기까지 오래 걸렸어요. '안 됐나보다', 멀리서 기사만 보고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어느날 제가 영화제에서 감독님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 때 저에게 따로 인사를 하러 오시더라고요. '음?' 그 때 감독님이 '예진아 밥 한 번 먹자' 그러셨어요. 그 때 '아, 시나리오 주시려나 보다' 싶었어요. 시나리오를 고치던 단계셨던 것 같은데 제가 '비밀은 없다'를 찍을 때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주셨어요."
'덕혜옹주'에 대한 애착이 깊은 것은 하고 싶었던 영화였던 것 때문만은 아니다. 손예진은 이 영화에 10억을 투자한 것으로도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그만큼 작품에 특별한 애정이 많았다.
"감독님이 8년간 영화를 준비하셨다는 얘기가 되게 불쌍하게 느껴졌어요. 어떻게 8년을 기다리셨을까요. 더 잘 돼야겠다는 생각이었죠.(생략) 선뜻 낼 수 있었던 건 아니에요. 덜덜덜 떨면서 했죠. 그래서 울었던 건가? 나의 피와 살로 만든 거라서?(일동 웃음) 어릴 때는 항상 (작품에 대한) 책임감을 별로 느끼지 못했어요. 연기만 잘하는 데 급급했어요. 그런데 30대가 되고 배우로서의 마음이 점점 커졌어요. 영화라는 게 더 시야가 넓어졌어요. 단지 영화만 하고 끝이 아니더라고요. 점점 넓어지니까 회차부터 어떤 구조와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지 보게 돼요. 오히려 감독님보다 더 알게 되는 부분도 있어요. 배우들은 일 년에 여러 편의 작품을 찍으니까요. 상업영화는 돈과 조금 더 시간을 갖고 찍으면 좋은 영화가 나올 확률이 더 높아요. 적절히 배분이 돼야하는 지점에서 스케줄상 빡빡할 때 있는 스트레스가 있어요. 감독은 감독, 스태프는 스태프대로 퀄리티는 최상의 퀄리티로 찍어야하니까 작은 버젯으로 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보니까 욕심이 생겼어요."
영화를 찍으면서 손예진은 덕혜옹주에 깊이 몰입했다. 해방 후 친일파 한택수(윤제문 분)과 조우하는 장면에서는 스스로도 그 인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훗날 허진호 감독은 이 때 보여준 손예진의 연기를 칭찬하며 "접신을 한 것 같았다"고 표현한 바 있다.
'덕혜옹주'가 손예진의 운명처럼 느껴지게 한 것은 한 가지 숨겨진 사건이 더 있었다. 영화를 준비하는 기간에 실제 덕혜옹주의 말년을 지켜 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 영화를 찍기 위해 만났던 일본어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 선생님의 시어머니가 1980년대, 덕혜옹주가 말년을 보낸 서울 대학교 병원의 수간호사로 재직하며 그를 본 적이 있었다.
"(시어머니께)얘기를 해달라고 했더니 덕혜옹주가 그 때는 사람들에 관심이 없고 단발에 머리에 핀 하나 꽂고 돌아다니셨대요. 멍한 눈으로 계속 왔다갔다하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고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소름이 끼쳤어요. 어떻게 그 때 당시 어떻게 그랬고 또 그렇게 쉽게 잊었을까요? 일본어 선생님 시어머니께서 그 느낌을 얘기를 해주시는데, 이런 이야기들이 그저 옛날 이야기가 아니었던 거예요. 그렇게 얘기하면서 감정을 잡고 했어요. 끝을 알잖아요. 그래서 연기하면서 마음이 아팠어요."
손예진은 인물에 너무 몰입돼 빠져나오지 못하는 성격은 아니라고 했다. 이번 영화도 찍으면서는 강하게 몰입했지만, 영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여행을 떠나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사실은 빠져나오기 힘들까봐 하루라도 빨리 여행을 다녀온 것도 있다. '비밀은 없다'를 끝내고, 또 부랴부랴 '덕혜옹주'로 찾아온 손예진. '소처럼 일한다'는 수식어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이 여배우는 잠깐의 휴식을 기다리고 있다.
"이젠 쉬어야 해요.(웃음) 다 겹쳐져서 어떻게 하다보니 이제 쉬고 영화 개봉하고 쉬고 싶은 마음 뿐이네요." /eujenej@osen.co.kr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