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배급사들이 매년 주목하는 연간 흥행 대목은 설과 추석 연휴, 그리고 여름이다. 특히 학생들 방학과 직장인 휴가가 겹치는 7월초~8월말 여름 성수기는 한국영화 대작과 블록버스터 외화가 정면 충돌하는 격전지다. 그래서 각 메이저는 주력들을 포진하기 마련이고 연초부터 어떤 작품을 내세울지 전략을 짜느라 고생한다.
올해 여름대전 라인업은 사실상 4월 중순께 확정됐다. CJ '인천상륙작전'과 NEW '부산행', 그리고 롯데 '덕혜옹주'와 쇼박스 '터널'이 출사표를 냈다. 상대 선수를 보면서 자기 패를 고르는 눈치싸움이 치열했다. CJ는 지난 해 '명량'에 이어 역사물 대작 '인천'으로 여름시장 공략을 일찌감치 결정했고 NEW는 칸 국제영화제에 출품했던 '부산행'이 심야 상영에서 기립박수를 받는 등 호평이 쏟아지자 기세를 탔다.
쇼박스는 하정우와 오달수의 환상 콤비에다 '끝까지 간다'로 한국 영화계를 발칵 뒤집었던 신예 김성훈 감독을 앞세웠다. 스릴러 '터널'이다. 여름대전을 앞두고 여유도 있었다. 지난 봄, 강동원X황정민의 코믹액션 '검사외전'으로 천만 가까운 관객을 모으면서 기대와 상상을 초월하는 대박을 쳤기 때문. 다른 배급사들이 '뭘 낼까' 고민하는 틈새 시장을 노려 일정 수준의 흥행이 보증되는 강동원 카드를 꺼냈고 경쟁사들은 알아서 피했다.
최근 2년새 거의 흥행작을 내지못한 롯데는 허진호 감독의 '덕혜옹주'에 사활을 걸었다. 대목 극장가에서 여주인공 원톱 영화가 사라진지 오래인 상황. 그래도 손예진을 믿기로 했다. 역시 롯데가 고전을 면치못했던 2014년 무렵, '해적 바다로 간 산적'으로 흥행 단비를 내리게 한 행운의 여신이 바로 손예진 아니었던가.
여름대전 라인업의 윤곽이 살짝 드러났던 올 초에는 '인천'-'터널'-'부산행'='덕혜'라는 1강1중2약의 도식이 자주 등장했다. 그러던중 칸 국제영화제발 '부산행' 찬사 뉴스들이 보도를 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인천'-'부산행'-'터널'-'덕혜'의 순서로 갔다. 1강이 아니라 점차 2강 구도로 보는 시선이 늘어나던 시점이다. NEW는 자신감을 얻었고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전환했다.
라인업 확정 이후부터는 개봉 시기를 놓고 4대 메이저 간에 눈치 싸움이 벌어진다. 늘 그렇다. 신의가 깨지고 배신에 치를 떨며 서로 사이가 멀어지거나 가까워지곤 한다. 어차피 한국 영화시장의 정해진 파이를 놓고 얼마씩 나눠먹느냐 싸움이니까 당연한 귀결이다. 지난 해에는 '명량'이 독식하다시피 큰 몫을 가져가는 바람에 나머지 3사는 주린 배를 채우느라 허덕였다. 쇼박스는 가장 먼저 '군도'를 개봉해 기세좋게 출발했다가 두 번째 주자 '명량'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순식간에 경쟁 대열에서 이탈하는 아픔을 맛봤다.
2016년, CJ는 이번에도 두 번째 자리를 찍었다. NEW는 '지난해 쇼박스처럼 될라'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1번을 뽑았다. 3번 '덕혜' 4번 '터널'의 순. 여름대전은 한국영화끼리의 싸움만이 아니다. 할리우드가 늘 일정 몫 이상을 챙겨가기에 이들의 배급 동향에도 신경을 써야한다. 개봉하면 터지는 본 시리즈의 4번째 작품 '제이슨 본'은 '인천'과 같은 7월 27일에 막을 올렸고 막강한 팬덤을 자랑하는 DC 히어로물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덕혜'와 한 날, 8월3일로 판이 짜였다.
뚜껑을 열자마자 '부산행'의 흥행은 흔들어놓은 사이다캔마냥 폭발했다. 좀비떼의 위력은 금세 전국을 휩쓸었고 공유와 마동석, 그리고 정유미는 첫 천만배우의 타이틀을 따기 직전이다. '부산행' 파워가 예상치를 웃돌자 나머지 3사는 당황했다. 살짝살짝 개봉 날짜의 조정 소식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CJ는 '인천'으로 상륙작전을 진행시켰고 '부산행'을 2위로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덕혜'. 여름대전 라인업이 드러난 후 늘 약자로 지목됐던 이 영화는 시사회 후부터 다크호스로 급부상했다. 웃음과 눈물, 감동이 교차하는 허진호표 연출이 빛을 발했고 덤으로 '암살' 스타일의 화려한 총격 액션까지 곁들여졌다. 덕혜 역 손예진과 그를 사랑한 남자 박해일은 인생연기를 뽐냈다.
결국 선택은 관객의 몫이다. '덕혜옹주'는 개봉일 3위로 출발후 3일만에 1위에 오르는 역전극을 펼치며 단숨에 여름대전의 판도 변화를 선언했다. 같은 날 막을 올린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물론이고 1주 앞서 개봉한 '인천상륙작전'에도 밀리는 듯하더니 지금은 또 하나의 천만 기대작으로 자리잡았다. '덕혜'가 선보인 개싸라기 흥행은 시간이 흐를수록 파괴력이 커지는 게 특징이다.
그렇다면 다음 순서는? '터널'과 수애 주연의 '국가대표2'가 개봉을 기다리는 중이다. '덕혜'도 자신이 의외의 흥행 반전을 이뤄냈듯이 마지막 주자들에 추월당해 분루를 삼킬수 있다. 아직 올 여름대전의 승부는 결정지어지지 않은 채, '부산행'만이 7일 천만고지를 돌파하면서 먼저 웃고 있을 뿐이다. /mcgwire@osen.co.kr
[사진] '덕혜옹주' '부산행'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