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가 등장한 후 슈퍼 히어로 영화계의 판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서로 다른 세상에서 활약한다고만 생각했던 영웅들이 한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세계관은 만화를 뚫고 나와 이야기와 볼거리를 한층 풍부하게 만들었고, 전 세계 관객들이 이 같은 변화에 화답했다. 마블은 엄청난 돈을 벌어 들였으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를 거쳐간 배우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특히나 히어로 무비에 박했던 우리나라에서까지 천만 관객을 동원할 정도니 말 다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기반의 영화들은 거대한 스케일 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캐릭터 설정, 대중을 아우를 만한 유머 코드를 스스로의 전유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마블의 영원한 숙적 DC도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앞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트릴로지가 공전의 히트를 치기는 했지만, 이는 놀란의 승리였지 DC의 성취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팀 버튼의 ‘배트맨’도 마찬가지다.
꼭 유명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야만 걸작이 나오냐 한다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모두가 알다시피 마블은 신인이나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감독들을 주로 기용하는데, 제작사 입장으로 볼 때 몸 값도 싸고 연출 과정에 마음대로 간섭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사실 마블 코믹스 속 생동하는 캐릭터들을 끄집어 내서 말만 되도록 배열해도 중간은 갈 수 있다. 마블에 비하면 DC 코믹스의 캐릭터들이 다소 어둡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매력이 덜 한 것은 아니다.
DC도 확장 유니버스의 서막을 열었다. 첫 작품은 잭 스나이더 감독의 ‘맨 오브 스틸’. ‘슈퍼맨’의 리부트로 지대한 관심을 모았던 이 영화는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호불호가 극명히 갈렸다. 다소간의 영상미는 획득했을 지 몰라도, 액션과 플롯이 지나치게 길고 산만했다. 이어 스나이더 감독은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의 연출도 맡았는데, 그는 이 영화 때문에 전무후무한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 잭 스나이더의 한계가 제대로 드러났고, 오랜 시간 사랑받아 온 배트맨과 슈퍼맨은 마마보이로 전락했다.
초반 기선 제압에 완벽히 실패한 DC 확장 유니버스는 ‘수어사이드 스쿼드’로 도약을 노렸다. 특히 조커의 귀환과 할리퀸의 등장에 뜨거운 기대가 몰렸다. 마블의 대중적 성공을 의식해 개봉 직전 재편집이 이뤄졌다는 소식은 팬들을 반신반의하게 했지만,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공개된 현재,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혹평의 뭇매를 맞고 있다. MCU 기반 영화들과의 비교는 예견된 수순이었고, 이야기의 개연성 부족이나 캐릭터의 깊이 문제가 지적 대상으로 떠올랐다. 극 초반 약 30분 가량을 할애해 새로운 캐릭터들을 소개하는 부분이 가장 재미있었다는 평가는 거의 지배적이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플롯은 매우 직선적이다. 식상할 수는 있어도 복잡하지는 않다. 국가가 통제 불능의 악당들을 동원해 더 큰 악에 맞선다는 단 한 줄로 설명될 이야기가 어려울 리 없다. 게다가 이 영화는 빌런들을 데려다 천편일률적 히어로물을 찍은 적이 없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악인들을 움직이는 것은 공명심이 아니다. 심지어는 돈이나 석방 같은 보상도 아니며, 국가가 볼모로 삼은 그들의 약점이고 스스로가 품고 있는 인정 욕망이다. 행위의 동기 자체가 영웅의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 영화에서는 미래를 슈퍼 빌런에게 맡길 수밖에 없던 국가의 나약함과 비도덕적 면모 또한 노골적으로 폭로된다. 인챈트리스(카라 델리바인 분)는 수뇌부 앞에서 이란 국방부의 기밀문서를 간단히 빼 내는 묘기(?)를 선보이고, 미국은 그 불법적 능력에 반해 태스크포스X 프로젝트를 승인한다. 악당들의 존재가 노출될 경우 폐기 처분하겠다는 계획을 쉽게 내뱉는다. 죽더라도 관 뚜껑에 성조기를 덮어 줄 생각 따위는 없어 보인다. 월러 국장(비올라 데이비스 분)은 첫 대면부터 “너 악마야?”라고 묻는 할리퀸(마고 로비 분)에게 “어쩌면”이라고 답하기도 한다. 그리고 월러 국장이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다루는 방식은 실로 악마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자살특공대를 향한 연민이 들 수는 있지만, 이들을 영웅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근거는 될 수 없다.
캐릭터 소개에도 꽤 공을 들인 모양새다. 먼저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칭찬하는 초반의 스타일리시한 영상은 초등학교 교과서 급으로 쉽게 극 중 인물들을 설명하고 있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캐릭터 전사(前史) 역시 납득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다. 악당이라고 우정이나 사랑을 모를 리 없다. 특수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개인이 소외당하고 자신을 혐오한다는 설정은 ‘엑스맨’ 시리즈에도 나온다. 또 합법적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맘껏 처단할 수 있다는 것은 악당들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지 않나.
할리퀸과 그의 연인 조커(자레드 레토 분)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는 했지만, 나머지 캐릭터들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특히 최고의 히트맨 데드샷(윌 스미스 분)은 모든 총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뿐만 아니라 타깃을 백발백중으로 맞힌다. ‘마셰티’ 시리즈의 마셰티(대니 트레조 분)처럼 한 자루의 칼만을 쓰지 않는다 해서 손에 총이 들리기만 하면 ‘엑스텐’을 해 내는 데드샷을 흔해 빠졌다 할 수 있을까.
NBA 최고 명장 필 잭슨 감독의 트라이앵글 오펜스 인용도 적확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모든 구성원은 막강한 공격 능력을 갖춘 공격수다. 이들은 전부 득점 지역 내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되, 점수를 따낸다-즉 살아 남는다-는 공통의 목적을 갖고 다각도로 협업한다. 인챈트리스의 연인 릭 플래그(조엘 킨나만 분)가 괴생물체들에게 잡혀갈 때마다 이들은 목에 장착된 폭탄이 터질 위기, 즉 실점할 위기를 맞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이기심을 버리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맥락 없이 움직이는 것 같이 보여도, 이 자살특공대의 전략은 뚜렷했다.
혹평에 비해서 흥미진진한 영화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DC의 패착은 매우 분명하다. 이 대목에서는 마블과의 비교를 다시 해야 할 듯하다. MCU 기반 영화의 시작은 ‘아이언맨’ 솔로 무비였다. 그리고 ‘어벤져스’가 나오기까지, 헐크와 토르, 캡틴 아메리카의 이야기가 먼저 펼쳐졌다. 개 중 ‘아이언맨’이 흥행하며 팬들을 흡수했고, 많은 사람들이 MCU 캐릭터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으며 자발적으로 이에 대한 정보를 얻어 나갔다.
반면 DC의 행보는 마블을 과도하게 의식한 나머지 섣부른 판단을 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에 앞서 솔로 무비들로 서사를 쌓아가야 했는데, ‘맨 오브 스틸’ 한 편으로는 슈퍼맨의 이야기조차 설명하지 못했다. 기실 새로운 캐릭터 소개용 영상이나 다름 없는 작품이 MCU 기반 영화에 없었냐고 한다면 그렇지도 않다. 허나 새 캐릭터를 향한 낯섦이나 서먹함은 상대적으로 적다. 이를테면 ‘어벤저스’의 빌런 로키(톰 히들스턴 분)는 이미 ‘토르 : 천둥의 신’을 통해 얼굴이 익은 상태에서 등장했다.
DC의 야심작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들인 수고에 비해 효율이 굉장히 떨어진 결과물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심지어는 개봉 이후 조커 역의 자레드 레토가 밝힌 막판 급 편집 전 내용에 훨씬 눈길이 간다. 그러나 그 완성도를 논하자면,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 만큼은 아니라고 ‘매우 보여진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수어사이드 스쿼드’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