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 대중이 배우 하정우를 알아보기 시작한 것은 영화 '추격자'(나홍진 감독)에서부터였다. 소름 끼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 역을 맡은 그는 당시 실제 범죄자라 해도 믿을 정도의 실감나는 연 기로 관객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영화 흥행 직후, 지나가던 시민들이 그와 눈을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하니, 분위기를 알 만하다. 오죽하면 '국민살인자'라는 별명이 생겼을까. 모든 게 탁월한 연기력 탓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이미지는 긍정적이고 친화적인 쪽으로 변모해갔다. 남자다우면서도 유쾌한 영화 밖의 캐릭터와 어떤 배역을 맡든 족족 보여주는 '믿고 보는 연기력'이 '국민살인자'를 호감형 배우로 거듭나게 한 것. 특히 대중은 어떤 역할을 맡든 그 인물에 미묘한 인간미를 부여하는 하정우 특유의 스타일을 좋아하게 됐다.
실제 하정우가 맡은 역할들은 악역과 그렇지 않은 역을 가리지 않고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역할들이 많다. 예컨대, 그는 일가를 거느린 건달 두목임에도 집안 어른의 권위를 내세우며 접근하는 허풍쟁이에 속아 넘어가고('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2011), 무뚝뚝하고 냉정한 남편인 듯하다가도 목숨을 바쳐 아내를 구하며('베를린', 2012), 왠지 독립군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능글능글한 매너와 멘트를 보여주고('암살', 2015), 자신이 제대로 사기를 쳐 필요한 것을 다 얻어냈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에 크게 뒤통수를 맞아 버리는('아가씨', 2016), 어딘지 모르게 인간적이고 빈틈 많은 인물이다.
하정우는 상당히 사실적인 연기를 하는 배우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선 어떤 인간이든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인물이 없기에 그가 표현하는 인물들의 인간적인 면모는 사실적 연기를 드러내는 요소로 여겨진다. 초기작이었던 '용서받지 못한 자'(2005)에서도 그는 자신의 부사수로 온 동창생 때문에 갈등과 고초를 겪는 선임병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줬고, '국가대표'(2009), '황해(2010) 등 작품에서도 판이하게 다른 캐릭터를 맡았는데도 불구 왠지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어 관객들의 지지를 받았다.
유명한 '먹방'도 하정우가 그의 인간적인 캐릭터를 살리는 데 쓰는 도구다. 어떤 심각한 상황에도 하정우의 캐릭터들은 음식을 먹는데, 그냥 먹지 않고 매우 맛있게 먹는다. 인간이 그렇다. 아무리 심각한 상황에서도 배가 고프면 잠시 시름을 놓고 맛있게 먹기 마련이다. 하정우는 음식을 먹는 장면에서 다양한 것들을 보여줬지만 그 속에 공통점이 있다면, 보는 이들의 식욕을 자극할만큼 맛있게 먹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매우 인간적이다. 영화 '황해' 속 등장하는 핫바 '먹방'은 편의점에서 이른바 '하정우 세트'를 탄생시켰고, 김을 먹는 장면은 여전히 '먹방'하면 가장 먼저 회자되는 장면이다. 그 만큼 그의 '먹방'에는 대중의 감성을 건드리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런 하정우표 인간미는 새 영화 '터널' 속 평범한 가장 정수의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평범한 가장인 정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무너진 터널 속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구조되기까지 수일을 터널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홀로 고독한 생존 싸움을 벌이는데, 그 과정에서 그가 보여주는 인간적인 매력이 관객들로 하여금 정수의 상황에 더 몰입하게 해준다.
정수는 차 안에서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평소 좋아하지 않았던 케이크를 주식으로 삼고 한 병의 물로 버티기 위해 고민하고 심지어 개사료를 먹기까지 한다. 이 같은 과정은 마냥 처절하고 무겁게 그려지지 않는데 터널 안에서 혼잣말을 하면서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정수의 모습에서는 웃음과 연민이 배어난다. 코믹한 상황들도 많다. 특별히 하정우는 터널 속 장면들을 위해 다양한 애드리브 연기를 펼쳤는데, 그 역시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는 데 일조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미남'이라고 부를만 하다. 어떤 캐릭터든 미워할 수 없는 탄생시켜 온 그가 또 어떤 캐릭터들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쌓아갈 지 기대감을 준다. /eujenej@osen.co.kr
[사진] '터널',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암살', '아가씨' 스틸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