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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은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멜로 거장'이다. 한국 영화 팬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고 먹먹함에 눈물을 흘리거나 '봄날은 간다' 속 명대사에 공감해 가슴을 쓸어내렸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런 허진호 감독이 무려 4년 만에 내놓은 신작 '덕혜옹주'는 멜로의 영역을 벗어나 시대적 상황 속 불행했던 한 여자의 인생을 조명한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삶을 그린 이 영화에서는 덕혜옹주(손예진 분)와 그를 끝까지 지키는 독립군 김장한(박해일 분)의 러브라인 가능성이 살짝 엿보이긴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딱히 멜로라고 꼬집어 말할만한 장면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모두 허진호 감독이 의도했던 바다.
"우리 영화는 장한이 덕혜옹주를 (고국으로)데려오는 이야기가 한 축입니다. 덕혜의 삶과 그런 덕혜를 지키려고 하는 장한의 이야기인데, 그것이 멜로로만 보여질 수 없는 부분이 있죠. 사랑했던 여자를 데려온다는 얘기보다는 또 어떻게 보면 영화에도 나오지만, 나라의 자존심일 수 있고, 역사적 사명일 수 있고 여러가지가 있어요. 그걸 멜로라는 하나의 감정으로 포장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덕혜를 데려오는 장한의 마음이 하나로만 보여지는 것에 대해 경계했죠."
그래서 편집된 장면도 여럿이다. 실제 '덕혜옹주'에는 노인이 된 장한이 일본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덕혜옹주를 찾기 위해 재일동포가 된 과거 독립군 동료 복동(정상훈 분)의 차를 타고 가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복동과 장한이 결혼과 가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장한의 대사는 많지 않았지만, 허진호 감독은 행여 그 부분으로 인해 덕혜옹주와 그의 관계가 멜로로만 비춰질까 편집했다.
멜로가 빠졌다고 해서 허진호 감독의 색깔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덕혜옹주'에는 시대의 풍파 속 사그러진 한 여인의 삶에 대한 연민이 섬세하게 녹아들어 있어 끝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울리고 만다. 그리고 이처럼 섬세한 연출은 구태의연한 표현을 떠나 사실적인 감정을 드러내고자 하는 허 감독 특유의 스타일 때문에 가능했다. 손예진을 비롯한 배우들은 감독이 항상 "당신이 라면 어떨 것 같으냐"고 물어봐 배역에 대한 고민을 더 깊이 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바로 이것이 허진호 감독의 연출 비법이었다.
"그게 제가 영화를 만들어 가는 방식입니다. 처음에는 배우들이 감독님이 썼으면서 왜 물어보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전 사람을 규정해서 미리 만들어 놓고 '이런 사람이야'라고 보여주는 게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대사가 많이 바뀌는 경우도 많고, 배우와도 어떤 행동이나 얘기를 정확하게 생각을 가지고 하지 않아요. 그러면 배우들의 무의식 중에 연기가 나올 수 있고,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답을 찾아가는 부분이 재밌죠. 연기를 할 때 감독이 답을 안 해주니 배우 스스로 자꾸 생각을 하겠죠. 그런 걸 좋아합니다."
인터뷰②에 계속 /eujenej@osen.co.kr
[사진] 민경훈 기자 rumi@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