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유진모의 취중한담]요즘 시청자들은 예능 프로그램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지상파 방송사와 케이블TV의 경계가 허물어진 지 오래고, 그 외 다른 플랫폼까지 시청률 경쟁에 가세함으로써 예능은 만화나 통속소설보다 더 대중에게 가까운 피로회복제 겸 심심풀이 땅콩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마냥 예능이 순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KBS2 ‘우리 동네 예체능’처럼 비인기 스포츠나 레저를 널리 알리고 국민건강에 이바지하거나 MBC ‘무한도전’처럼 역사와 유물에 대한 새삼스러운 교육효과를 일으키는 반면 MBC ‘우리 결혼했어요’처럼 억지 연출 혹은 이미지 조작이라는 비난 속에 지나치게 소비적이고 자극적이라는 역기능이 지적되는 프로그램도 존재한다. 지나친 시청률 경쟁심리에서 비롯된 제작진의 과잉욕구 혹은 소화불량 탓이다. 시청자들의 피로감을 조장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KBS 교양국에서 관리하는 2TV ‘수상한 휴가’는 참으로 제목만큼이나 수상한 프로그램이다. 연예인이 연예인이든 평범한 사람이든 평소 절친하게 지내는 친구를 파트너로 지목해 원하는 외국으로 고생스러운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은 별로 새로울 게 없지만 보다보면 슬며시 빠져드는 중독성과 교육효과가 꽤 큰 정체불명의 교양을 빙자한 예능이다.
지난 5월말~6월초 2주에 걸쳐 이 프로그램은 최여진과 이시영의 인도여행기를 내보냈다. 이들이 찾은 곳은 수도 뉴델리도 아닌 그곳에서 무려 15시간 이상 이동해 도착한 인도에서 가장 덥고 건조한 사막지대 자이살메르였다. 이 프로그램이 왜 교양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동 채널의 ‘1박2일’은 국내의 방방곡곡을 떠돌며 비교적 현지 주민과 비슷한 조건의 숙소에서 자거나 복불복 게임에 진 사람은 야외취침을 하는 게 고작이고, 고생이라 봐야 까나리액젓 음료를 마시거나 입수하는 게 최악인 데 비교해 차원이 다르다.
물론 다수의 제작진이 따라붙긴 하지만 인도는 벌건 대낮에 성폭행이 발생하는 나라다. 아직 미혼의 아리따운 여배우들이 겪어야 할 여행지치곤 가혹했다. 에어컨조차 나오지 않는 좁은 기차 안에서 오랜 시간을 이겨내는 모습은 ‘수상한 휴가’가 아니라 ‘속상한 휴가’였다.
물론 광활한 타르 사막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자이살메르 성에 도착해 그 아름다운 유산을 만끽하며 공주 연기를 하는 가운데 보람과 감동을 느낄 수 있긴 했지만 애초부터 이 프로그램은 유명 연예인을 ‘생고생’시키는 가운데 교양의 효과를 보는 동시에 그 속에 담긴 사디즘의 카타르시스를 시청자에게 주고자 하는 예능의 목적이 뚜렷했다.
지난 7월엔 류승수와 조동혁이 모로코 마라케시부터 사하라 사막까지 이어지는 1000km 바이크 종주에 나섰다.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이들의 휴가는 서바이벌 게임에 가까웠다. 특히 공황장애를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시간의 비행을 이겨낸 류승수가 사막에서 배탈이 나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며 탈진하는 모습은 SBS ‘정글의 법칙’과는 또 다른 의미의 악전고투로 비쳤다.
프로그램의 형식은 간단하고 단출하다. 널리 알려진 휴양지가 아닌, ‘오지 탐방’ 수준의 ‘사서 고생’을 절친한 두 파트너가 특별한 경험 속에서 서로의 우정과 ‘궁합’을 확인하는 가운데 콤비네이션으로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에게 KBS1 ‘걸어서 세계 속으로’나 ‘정글의 법칙’에서 보기 힘든 외국의 환경과 풍광을 보여주고 또 감동과 재미를 주며 일반 휴가와 다른 차원의 색다른 경험을 즐기도록 만들어준다는 데 있다.
지상파 방송사 예능 프로그램 제작진이라면 누구나 시청률을 최우선의 값어치로 여기면서도 ‘그래도 지상파인데’라는 일말의 양심 혹은 자존감은 견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무한도전’이 영향력 1위라는 자존심 하나로, SBS ‘런닝맨’이 중국 내 최고의 예능으로 인정받는다는 자긍심 하나로 어마어마한 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교양국 직원들은 그 순서가 바뀐다. ‘지상파다운’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지상최대의 목표이면서도 시청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KBS1 ‘6시 내 고향’이 25년 넘게 장수할 수 있는 건 소신보다는 시청률 덕이고, KBS2 ‘아침이 좋다’에 신인 아이돌그룹을 출연시키는 것 역시 시청률과 직결된다.
‘수상한 휴가’는 그런 명분과 실리의 양극단을 이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프로그램이라는 데서 모든 걸 떠나 존재의 의의가 강하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해외로 떠나는 휴가라고 하면 유명 관광지나 휴양지, 혹은 비교적 고급스러운 리조트를 꿈꾼다. 앙코르와트나 에페소스에 가서 장엄한 유적을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덥고 비좁은 기차로 이동하고, 벌레가 들끓는 숙소에서 잠을 자려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상한 휴가’는 그렇게 하기 때문에 수상하다. 게다가 이 휴가를 빙자한 여행 중에는 여러 가지 돌발상황이 발생한다. 그건 위기고 고통이다. 여기엔 영화 ‘터널’에서 정수(하정우)가 터널붕괴사고로 죽음의 위기를 맞자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라고 하늘을 원망하는 듯, 자조하는 듯한 혼잣말을 하는 것과 비슷한 철학이 깃들어있다.
유명 관광지는 여행의 매뉴얼이 정해져있다. 천재지변이나 테러가 아닌 이상 난관이나 위험은 닥치지 않는다. 하지만 ‘수상한 휴가’의 주인공들이 지나가는 경로는 잘 닦인 여행경로가 아니기에 예측이 불가능한 변수가 생기곤 한다. 사람들은 위기에 닥쳤을 때 대부분 당황해 동요함으로써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지거나, ‘이건 꿈이야’라고 부정하는 현실도피를 선택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하는 경향으로 나뉘기 마련이다. 여기에 이타성이 개입할 여지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수상한 휴가’는 달라서 돋보인다.
주인공들은 항상 서로를 격려하고 헤쳐 나가기 위해 앞장서려 하며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려한다. 그게 연출이든 연기든 시청자는 그 속에서 드라마와는 다른 위기감과 감동을 느끼기 마련이다. 여기서 공포라는 허상을 핑계 삼아 우정 혹은 인간애의 위대성을 부정하고 절망에 분노하는 이기심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깨우쳐주는 교훈이 살아 숨 쉬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거창한 초월적 종교나 대단한 형이상학적 이론은 없을지언정 원초적인 철학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건 ‘수상한 휴가’라는 엇박자의 제목에 함축돼 있다. 휴가라면 당연히 쾌적하고 여유로우며 즐거워야 하건만 휴가를 떠난 두 명의 친구는 매번 위기에 노출된다. 그건 인생이란 게 어차피 필연의 고통과 우연의 만족이라는 두 극지점의 일직선상에서 왔다 갔다 하는 시소게임이니만큼 진정한 우정만 동반된다면 탐험도 훌륭한 휴가가 될 수 있다는 인생의 교훈이다./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
<사진>'수상한 휴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