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끝까지 간다'로 모두를 깜짝 놀래키며 이목을 집중케 만들었던, 늦깍이 천재 감독 김성훈을 수식하는 말들은 꽤 많다. 그 중 영화사 홍보 책자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가 바로 '장르 비틀기의 귀재'라는 표현이다.
무더위로 푹푹 쪄들어가는 한여름의 삼청동, 구석진 카페 2층에서 인터뷰를 위해 만난 김성훈 감독은 '장르 비틀기'라는 말에 쉼표조차 없이 답한다. "아니요. 비틀 힘도 없어요. 그러다가 제 손목 나가요."
짐짓 진지한 표정에 웃을 타이밍을 한템포 놓쳤더니, 스스로 웃음으로 '농담'이었음을 내비쳤다. 인터뷰의 무거움을 덜어내기 위한, 그 나름의 방식이었다.
'끝까지 간다'를 만들었던 김성훈 감독의 차기작 '터널'은, 그러니깐 딱 이런 김성훈 감독 특유의 '취향'이 흠뻑 배어난 작품이다.
"앉아있는 자세도 삐뚤하고, 넥타이도 조금 비틀어서 매는 편이 좋거든요. 어쩌면 이건 뻔한 이야기일 수 있어요. '끝까지 간다'도 이번 '터널'도 말이죠. 비리 형사, 터널에 갇힌 남자, 그 뻔하디 뻔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하는 데 관심이 많아요. 오글거리는 뻔함은 피하고 싶거든요. 일단 비트는 게 제 취향입니다. 다행히 그 점을 관객분들이 좋아해주시는 것 같아요."
한 남자가 무너진 터널에 갇히고 구조를 기다리는 내용이 담긴 '터널'은 단순 상황적 설명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어둡고 무거운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그 묵직한 상황 속에서, 유머 코드를 불쑥 삽입시켜, 관객의 웃음을 수시로 자아낸다.
"제 스스로 무거운 걸 못보는 것 같아요. 재난의 순간에 빠졌다고, 절대적인 슬픔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절망 안에서도 순간 순간의 웃음이 있지 않을까요.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대도, 부정과 절망, 분노, 긍정, 체념 등 감정의 단계가 있다고 하잖아요. 아마 영화 속 정수(하정우)라는 인물도 " 무너진 터널 안에서 그러지 않았을까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주인공의 의외릐 긍정적 태도, 이는 화성에 홀로 남겨진 마크 트와니(맷 데이먼)를 담아냈던 영화 '마션'(감독 리들리 스콧)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정우씨와 그런 말을 했어요. 갇혀 있다고 해서 우울할 수만은 없지 않겠다고. 그러면 더 가짜 같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죠. '정수'라는 인물은 상황에 적응을 할테고, 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면, 자신이 있던 공간을 청소하거나, 낙천적인 생각을 하며 버티지 않았을까요. 그런 점에서는 분명 '마션'하고 유사할 수도 있겠죠. 다만, 그런 것 외의 요소들이 많아요. 오히려 큰 틀에서는 1명이 갇혀있고, 1인극이 펼쳐진다는 점에서는 톰 행크스가 나왔던 '캐스트 어웨이'가 더 닮았죠. 물론 그것보다 더 유머러스한 방식이에요. '터널'은."
영화 '끝까지 간다'를 좋게 봤던 관객이라면 '터널' 역시도 분명 마음에 들 것이라는 확신도 내비쳤다. 직선적인 구조가 공통점이다.
"'끝까지 간다'는 시종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발생해요. 계속해 던져지고, 극복하고, 회피하고, 그런 상황들의 연속이죠. 말하자면 굉장히 직선적인 영화예요. '터널' 역시 그래요. 터널이 무너지고, 갇히고, 그 안에서 상황들이 던져지고, 극복하고, 적응하고…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어요. '끝까지 간다'는 고건수(이선균 분)가 상황을 쭉 극복하는 직선 구조라면, '터널'에서는 정수(하정우)가 그 역할을 맡았죠. 대신 직선의 구조 속에서 이야기가 확산되는 점은 달라요. 갇힌 사람, 구하려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제3의 방관자들, 이렇게요. '끝까지 간다'를 좋아해주셨던 분들이라면, 분명 '터널'도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 gato@osen.co.kr
[사진] 박준형 기자 soul1014@osen.co.kr, '터널'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