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영화 '최악의 하루'(김종관 감독)는 표현 그대로 한 여자가 하루동안 최악의 일들을 겪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장르가 로맨스라는 것은 이 여자가 겪을 최악의 일들이 곧 치정임을 알려준다. 치정이라고 해서 복잡하게 얽히거나 질척거리지는 않는다. 의뭉스러운 여주인공 한예리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에게 빠진 세 남자의 이야기는 산뜻하면서도 감성적으로 그려졌다.
18일 공개된 '최악의 하루'는 서울의 예쁜 풍경과 인물들의 만남과 헤어짐, 엉뚱한 유머가 어우러진 독특한 로맨스 영화였다. 특히 여주인공 한예리의 매력을 오롯이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여주인공 은희(한예리 분)는 연기 공부를 하는 배우 지망생으로 등장한다. 첫 등장신에서 은희는 스승의 연기를 지켜본 후 함께 호흡을 맞추는데, 연기를 못한다는 핀잔을 듣고 만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은희의 하루를 지켜보다 보면, 관객들은 사실은 은희가 아주 탁월한 배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 속 은희는 어쩌다 보니 서촌과 남산 일대를 종일 걷게 된다. 연기 수업을 마친 은희는 우연히 일본인 작가 료헤이(이와세 료 분)를 만나 길을 알려주게 되고 그와 커피를 마시게 된다. 료헤이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 계속 휴대폰을 울리는 남자친구 현오(권율 분)의 메시지. 배우인 현오는 특유의 얄팍함과 가벼움으로 은희를 화나게 한다. 현오의 촬영장 근처인 남산까지 올라가 그를 만난 은희는 결국 다툼 끝에 산책로를 다시 내려온다.
그러나 최악의 하루는 끝이 아니었다. 한 달 전 헤어진 유부남 운철(이희준 분)이 트위터에 올린 사진을 보고 은희가 있는 남산으로 달려온 것. 운철 앞에서 보여주는 은희의 행동은 현오의 앞에서 보였던 모습과는 또 달라 보는 이들을 웃게 한다. 운철 앞에서 진심인 척, 비련의 여주인공인 것처럼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는 은희와 그런 그에게 "헤어졌지만 사랑한다"는 식의 모순된 이야기를 거듭하는 운철의 대화가 재밌다.
정적인 분위기 속 곳곳에서 생동감을 주는 유머는 이 영화의 백미다. "진실이 어떻게 진심을 이깁니까" 같은 운철의 대사나 일본 작가 료헤이를 당황하게 하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 관객들을 폭소케 한다.
제옷을 입은 배우들의 연기도 매력적이다. 김종관 감독은 한예리를 여주인공으로 한 이유에 대해 "(배역이) 관계에 따라 성격이 바뀐다. 밝은 이미지를 가진 배우가 하면 캐릭터가 일차원적으로 보인다. 한예리가 개인적으로 볼 떄 조곤조곤한 말에 차분한 느낌이 있어서 그런 인상의 배우가 역할을 하면 (캐릭터에) 층위가 지어지고 재밌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 실제 세 남자의 앞에서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인 듯 꾸미지 않은(?) 내숭을 보여주는 한예리의 연기는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또 유부남임에도 진드기처럼 은희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운철을 연기한 이희준, 특유의 깐족거림과 허세 연기를 보여주는 권율, 한예리와 함께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이와세 료의 개성과 하모니는 전체적으로 진폭이 크지 않은 영화를 풍성하게 채워줘 즐거움을 준다.
네 남녀의 이야기는 마치 숨바꼭질 같다. 은희를 중심으로 남자들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은희의 '최악의 하루'가 어떻게 형성돼 가는지 보여준다. /eujenej@osen.co.kr
[사진] '최악의 하루' 스틸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