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유진모의 취중한담]1923년 일제강점기 의열단원과 함께 잡힌 경기도 고등경찰과 경부 황옥이 법정에서 “일본 경찰 관리로서 상부의 지시대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밀정 노릇을 한 것”이라고 진술한 역사적 사건에서 영화 ‘밀정’(김지운 감독, 워너브러더스 배급)은 시작된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 핵심인물로 의열단 중심인물 김장옥(박희순)이 지목된다. 독립운동자금 확보를 위해 암약하던 장옥은 일본경찰이 심어놓은 밀정의 밀고에 의해 일본경찰에 쫓겨 막다른 장소에 고립된다. 여기에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일하다 ‘독립이 될 것 같진 않고, 먹곤 살아야 하기에’ 변절해 동료들을 밀고하며 출셋길에 오른 일본 경찰 경부 이정출(송강호)이 나타난다.
직계상관인 조선총독부 경무국 부장 히가시(츠루미 신고)로부터 장옥을 생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정출은 장옥을 설득하기 위해 비무장으로 그의 앞에 서지만 눈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자결하는 친구를 무기력하게 바라봐야만 한다.
히가시는 작전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정출에게 또 다른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하시모토(엄태구)를 붙인다. 정출은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의 오른팔인 김우진(공유)에게 접근한다. 우진은 겉으론 경성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한편 문화재 밀매로 돈을 버는 사업가다. 정출은 자신의 신분을 밝힌 뒤 돈을 벌고 싶다는 야욕을 가장하고 우진 역시 모르는 척 자신과 함께 큰돈을 벌어보자고 야심에 가득찬 사업가로 행세하는 가운데 두 사람은 형과 동생의 관계를 맺는다.
어찌된 일인지 의열단의 행동은 일본 경찰에 사사건건 노출되고 결국 경성을 떠나 상하이로 도망가야만 하는 아찔한 상황이 된다. 상하이에서 여전히 가짜 유물을 제작하며 자금을 모으는 우진에게 정출이 나타난다. 히가시의 명령으로 우진에게 접근해 채산을 잡기 위함이었다.
채산은 우진에게 굉장히 위험한 제안을 한다. 일본 경찰의 압박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던 의열단은 헝가리 폭탄제조 전문가 루비크의 도움을 받아 강력한 폭탄을 제조해 경성으로 운반해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는 작전을 세우고, 그 위험한 여정에 정출을 길라잡이로 세우자는 것.
우진과 아침을 먹던 정출은 자신 앞에 채산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면서도 절로 흘러나오는 존경심을 애써 숨기려하지 않는다. 그날 밤 정출은 마주한 채산에게서 뿜어 나오는 범접 못할 숭고함과 강인한 정신력에 압도당해 그들의 경성잠입까지만 돕기로 약속한다.
어찌된 일인지 의열단의 비밀작전의 디테일은 하시모토 일행에게 낱낱이 보고되고, 결국 정출과 우진은 의열단 내부의 밀정을 잡아내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미 정출의 행동을 의심한 하시모토 일행은 경성행 열차 안에서 몰래 접선한 우진과 정출을 찾아내 총구를 겨눈다.
표피적으론 서로의 속내를 알지만 진심을 드러내는 듯, 끝까지 속이는 듯하는 정출과 우진의 신념 혹은 욕심이 양축을 형성하지만 오히려 주변인물들이 첩보영화치곤 액션과 반전이 심심한 단점을 보완해준다. 히가시는 당시 아시아를 집어삼키려던 일본 제국주의의 어긋난 욕망과 그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손꼽을 만큼 잔혹한 만행을 서슴지 않았던 홀로코스트의 민낯이다.
하시모토는 정출이 보유한 양면의 얼굴 중 어두운 면이다. 히가시는 “조선인으로 태어나면 선택은 딱 두 가지다. 일본에 충성하든지, 죽든지”라고 당시의 암울한 상황을 이기적으로 표현한다. 정출 역시 “독립이 되겠어?”라며 전자를 선택했지만 여전히 생존과 양심 사이에서 방황한다. 하지만 아직 젊은 하시모토는 단호하다. 무조건 ‘선 충성, 후 출세’다.
짧은 시간 등장하지만 채산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하다. 감히 자신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정출을 오히려 자신의 밀정으로 포섭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그의 용기는 ‘독립이 될지 모르겠지만 목숨은 아깝지 않다’는 마음으로 죽음을 불사한 당시 독립운동가의 표상이다. 최근 다시 조명되는 유관순 열사의 10대와 여자란 정체성을 뛰어넘은 위대함과 우렁찬 용기를 재현해내는 듯하다.
다만 유일한 여주인공 연계순(한지민)의 분량과 캐릭터는 많이 아쉽다. 채산의 비서로서 유일하게 그의 동선을 알기에 일본 경찰의 집중적인 추적을 받아온 이 중요한 인물이 옛 연인과의 지극히 개인적인 묵은 감정 때문에 거사를 망치는 빌미를 제공한다는 설정과 캐릭터 자체의 빈약함은 이 장중한 누아르에서 오히려 옥에 티다.
데뷔작이 코믹잔혹극이란 ‘조용한 가족’이었던 김지운 감독은 애초부터 누아르에 무척 관심이 많은 작가였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썩 괜찮은 누아르 ‘달콤한 인생’으로 관객들의 극찬을 이끌어낸 바 있다.
이번에도 그 기대감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혼돈의 시대에서 혼란스러운 선택이라는 양 기로에 주인공들을 서게 만든 그의 작가적 시각은 무조건 옳았다. 히가시나 하시모토는 목적을 위해 잔인하지만 정출은 인간미만큼은 잃지 않는다. 그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것도, 일본 경찰로 변절한 것도 모두 자신의 생존이 목적이었지 타자의 파괴는 아니었다.
그건 무장독립단체 의열단 역시 마찬가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이지만 죽기 위해 총을 든 게 아니라 자신들이 일본에 대항함으로써, 또 장렬하게 산화함으로써 후대에 독립된 조국을 안겨주고자 하는 정체성 회복과 종족보존의 법칙이었던 것이다.
물론 감독은 결코 일본의 승리로 마무리하진 않는다. 정출과 우진은 서로의 정체와 의도를 알면서도 속내를 감춘 채 가까워진다. 영화는 과연 의열단과 일본에 심어진 밀정이 누구인가에 천착하기보단 정출의 정체성 찾기를 탐닉한다.
드라마도 반전도 액션도 부족한 이 영화를 이끄는 힘은 역시 송강호다. ‘사도’에서 자식에게 기대를 걸고, 실망하고, 두려움을 느낀 끝에 결국 죽이고 마는 일국의 왕의 복잡다단한 심정을 경악할 정도로 소화해낸 그는 이번엔 애국자도 완벽한 매국노도 아닌 중간계에 속한 박쥐인간을 정말 절묘하게 탄생시켰다. 할리우드의 배트맨은 부르주아와 희생적 영웅 사이에서 고뇌하고 갈등한다. 과연 자신이 암울한 고담시에서 최고의 부자로서 살아가는 게 옳은지, 아니면 재벌의 재산의 사회환원과 같은 수준의 봉사로써 서민에게 안락한 삶을 제공하는 게 법에 어긋날지언정 정의로운 일인지 고민한다.
‘밀정’의 박쥐인간은 먼저 대의명분이 아니라 인간미적 측면에서의 혼돈 그 자체다. 그는 어떡해든 죽마고우인 장옥을 살리고자 했다. 경찰 상관의 명령을 무시해가면서까지 장옥을 생포하려 한 건 부장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우정이자 동정이었다. ‘덕혜옹주’의 한택수(윤제문)는 실존 인물 한창수를 모델로 한 캐릭터로서 대한제국의 고위관리였으나 더 높은 권력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고 조선 황족들을 일본으로 강제유학 보낸 대표적인 매국노다.
그런데 그는 기회주의자라기보다는 일본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게 한인 환각의 정신병자에 가깝다. 정출이 다른 점이다. 뼛속까지 매국노인 사람은 일본에 대한 환상 속에서 살지만 정출은 그냥 생존의 논리에 근거한다. 이런 심리의 정출을 송강호가 아니면 어떻게 완벽에 가깝게 창출해낼 수 있었을까? 그래서 오히려 잘 정제되고 절제된 공유의 연기력이 살짝 빛을 못 보는 게 아쉽다.
감독의 누아르에 대한 집착은 경성역에서의 의열단과 일본 경찰의 총격신에 애절한 루이 암스트롱의 재즈블루스 ‘When you're smiling’을 삽입한 데서 절정을 보인다. 기차 안에서의 정출의 슬로우모션이나, 경성역에서의 연계순의 체포장면에서의 사운드뮤팅 등도 적절한 테크닉이었다. 다만 지나치게 멋을 부리려 하다 보니 전체적으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듯 다소 무겁게 느껴진다. 물론 이 시대의 영화가 가볍다면 이상하겠지만.
재미로 따지면 ‘덕혜옹주’보단 월등하지만 ‘암살’의 상업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래도 140분은 절대 길지 않다. 송강호 공유 이병헌의 열연에 KBS2 ‘감격시대: 투신의 탄생’에서의 어설픈 연기에서 일취월장한 실력을 보여준 영화 ‘차이나타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상전벽해로 성장한 엄태구의 발견까지 덤인데.
김지운 감독은 꼭 시작과 끝에 매우 강한 임팩트를 심고 서로 연결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관람하자. 15세 이상 관람 가. 9월 7일 개봉./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
<사진> '밀정' 스틸 및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