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던지고 간 껌과 초콜릿에 감격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들이 먹다남은 전투식량 고기를 재활용한 게 부대찌게다. 이제는 전국민이 즐기는 기호식품이다. 한국전쟁 때다. '메이드 인 USA' 온갖 상품들에 환장하던 시절이 있었다. 미군부대 PX에 아는 사람 있으면 요즘 검찰 인맥 부럽지 않았다.
상전벽해. 중국 사자성어에 뽕밭이 바다로 변한다고 했다. 1980년대, 미국에서 싸구려 TV와 냉장고, 그리고 자동차로 삼송과 현다이가 슬금슬금 영역을 넓혀갔다. 대한민국은 어느새 무역강국이고 원조를 받던 OECD 회원국으로 격상됐다. 2016년, 미국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한국 TV가 시장을 싹쓸이했다"고 연일 울분을 토로한다. 실제 2000년대 세계 가전과 휴대폰의 프리미엄 시장은 '메이드 인 코리아'가 장악하고 있다. 현다이 자동차도 더 이상 덤핑과 싸구려의 대명사가 아니다. 잘 나갈 때는 독일차를 위협하고 일본차와 경쟁했다.
이렇게 겉으로 잘 나가는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전문가들은 '하드웨어에 강하지만 소프트웨어는 약하다'고 지적한다. 최첨단 휴대폰을 만들지만 그 걸 움직이는 소프트웨어는 미국산이다. 그래서 혐한론자들은 '베끼는 데 타고났어도 창의력이 부족하다'고 비웃는다. 열 받아도 아직은 현실이 그렇다.
특히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오면 미국 거대자본에의 종속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할리우드 영화가 무서워 극장에 뱀을 풀고 배우들 머리까지 밀어가면 '스크린쿼터 보호운동'을 펼친 것이 불과 10년 전이다. 한국영화가 양적 질적 성장을 이뤄낸 지금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습에는 수시로 초토화된다. 방송 소프트웨어인 프로그램 기획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 글로벌 저작권이 지금처럼 엄격하지 않던 시절에는 무단으로 도용하기 바빴고 그 이후엔 돈 주고 사다쓰는 데 익숙했다.
그런 한국 엔터테인먼트 소프트웨어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 건 드라마 '겨울연가' 등으로부터 불기 시작한 아시아 한류가 계기였고 아이돌을 앞세운 K팝을 발판삼아 북미 유럽 남미 등 세계로 진출했다. 한국영화 리메이크 판권이 할리우드 등에 팔리는 사실이 어느덧 자연스러워졌고 드디어 예능 포맷도 바람 돋힌 듯 나가고 있다.
최근에 가장 돋보인 예능 포맷 수출로는 tvN ‘꽃보다 할배’를 꼽을 수 있다. 이를 리메이크한 NBC ‘베터 레이트 댄 네버(Better Late Than Never)’는 미국에서 첫 방송부터 시청자 관심과 언론 호평을 듣는 중이다.
닐슨 미국 집계에 따르면 지난 23일(현지시간) 방송된 ‘베터 레이트 댄 네버’ 1회는 18~49세 시청자수 735만 명을 기록하며 동시간대 1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일간 시청률은 2위이며, 2016년 여름 새로 시작한 프로그램 가운데서도 첫 방송 시청률이 가장 높다. 이 정도면 대성공이다.
'꽃할배'는 KBS 재직 시절 '1박2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나영석 PD의 역작이다. 한국 tvN 방영에서도 신선한 소재와 참심한 기획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꽃할배' 시즌 1 종영 후에 "('꽃할배'는)스테디셀러 같은, 일일연속극이 되면 좋겠다. 가능하면 매년 한 번쯤은 선생님(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들을 모시고 해외로 나가려고 생각 중이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목표는 간단히 이뤄졌고 리메이크를 통해 미국 진출이라는 신화를 썼다.
‘꽃할배'의 미국 리메이크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다. 한국 예능프로그램 사상 최초로 미 지상파 방송사인 NBC에 포맷을 판매한 것이고 첫 방송부터 대박을 터뜨렸으니까. 2년 간의 제작편성 과정을 거친 '베터 레이트 댄 네버'에는 톱스타 헨리 윙클러를 비롯해 ‘스타트렉’ 윌리엄 샤트너, 전직 풋볼스타 테리 브래드쇼, '철권' 조지 포먼 등이 할배 역을 맡았다. 이서진이 맡았던 ‘짐꾼’으로는 코미디언 제프 다이가 등장했다.
‘베터 레이트 댄 네부'는 일단 4부작으로 구성됐다. 한국과 일본, 홍콩, 태국 등 아시아 4개국, 6개 도시를 미국의 꽃할배들이 여행하는 내용이고 첫 방송 무대는 일본 도쿄와 후지산으로 삼았다.
미국 현지 반응은 뜨겁다. OSEN의 미국 SNS 취재 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아메리칸 아이돌’과 ‘엑스팩터’의 심사위원 겸 가수 폴라 압둘이 "정말 즐기고 있다(I am really enjoying this)"고, ‘아메리칸 닌자 워리어’의 MC 아쿠바 바자비아밀라는 "유쾌하다(hilarious)"고, 유명 토크쇼 ‘Sally’의 진행자인 샐리 제시 라파엘은 "여성 버전 만들면 나를 꼭 불러줘(If you do a women's version, count me in)" 등 유명 셀러브리티들도 ‘베터 레이트 댄 네버’에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이같은 미국 리메이크의 대성공 뉴스를 접한 나영석 PD는 OSEN에 “결과가 좋아서 정말 기쁘다. 어르신들이 노년에 여행하는 정서가 다소 동양적인 측면이 있어 미국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예상외로 전세계인이 공통으로 즐길 수 있는 코드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어서 감회가 새롭다”고 소감을 밝혔다.
미국판 '꽃할배' 호평에 나PD만 기쁜 게 아니다.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에도 세계를 놀라게할 재능이 이 땅에 충분함을 미국 시청자들에 알렸다는 쾌거에 박수를 쳐야되지 않을까 싶다. /mcgwire@osen.co.kr
[사진] tvN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