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유진모의 취중한담]어느새 트로트라는 한 단어로 규정된 한국적 대중가요는 해방 후엔 ‘가요’로, 그리고 트로트 이전엔 ‘성인가요’로 지칭됐었다. 젊은이들은 포크 록 발라드 등에 열광했고, 중장년 이상은 구성진 가요와 정서적으로 더 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트로트계는 중장년 일색이다. 예전에 김수희가 있었고, 여대생 심수봉의 등장에 깜짝 놀랐으며, 장윤정의 득세로 인해 이제 젊은 트로트가수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트로트는 중장년 이상의 영역이다.
19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양수경이 지난 27일 KBS1 ‘콘서트 7080’에서 1시간 특집무대를 꾸몄다. 오래 쉬었다가 되돌아오는 가수들이 대부분 선택하는 장르는 트로트다. 그런데 양수경은 달랐다. 이날 그녀는 왜 1980~90년대 자신이 ‘발라드의 여왕’으로 불렸는지 충분히 입증했다.
은색드레스에 트레이드마크인 긴 생머리를 날리며 등장한 그녀는 ‘바라볼 수 없는 그대’로 포문을 열었다. 블루노트 음계는 아니지만 플랫음을 자주 포진함으로써 그 느낌을 충분히 주는 이 블루스 형식의 노래는 무르익은 그녀의 가창력을 새삼스레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엔 23인조 대형백밴드가 포진돼있었고, 조용필 콘서트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LED조명이 난무했다.
두 번째로 선택한 곡은 데뷔곡이자 바로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준 ‘그대는’. 청량한 피아노 연주로 시작하는 원곡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다가 중간에 재즈 형태로 변모되고 다시 강렬한 일렉트릭 기타 리프로 록의 느낌마저 주는 편곡에 실린 그녀의 목소리는 호소력이 짙었고, 톤 속에 짙은 감성이 배어있었다.
가사와 멜로디는 슬프지만 리듬은 경쾌한 셔플로 처리된 ‘당신은 어디 있나요’에선 김범룡이 우정출연해 그녀의 무대에 광채를 더해줬다.
이번 컴백음반의 타이틀곡 ‘사랑 바보’를 부를 때 그녀는 빨간 드레스로 갈아입고 머리를 올려 묶었다. 애절한 플라멩코 기타의 선율 위를 타고 가는 그녀의 목소리는 덤덤하다가 애잔하게, 다시 절정에 올랐다가 숨을 고르는 듯 감정의 기복을 절묘하게 조절하며 자유자재로 감정의 진폭을 조절하는 노련미를 보였다.
역시 컴백앨범에 수록된 나훈아 원곡의 리메이크곡 ‘갈무리’를 부를 땐 왜 양수경인지 확연하게 보여줬다. 나훈아는 이 곡을 전형적인 자신만의 ‘꺾고 돌리는’ 스타일로 불렀기에 그 누구도 취입할 엄두를 못 냈던 게 현실이었다. 그런데 양수경은 철저하게 절제된 톤으로 마치 해탈한 구도자처럼 시작해 슬픔의 끝을 느끼지만 절대 절규하거나 비탄하지 않는 스타일로 마무리했다. 전혀 다른 신곡의 탄생이었다.
자신의 대표곡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에서 역시 작곡자인 전영록과 컬래버레이션 무대를 꾸민 뒤 ‘못 다한 고백’을 부를 땐 검은 색 정장으로 의상을 바꾸고 다시 머리를 길게 풀어헤쳤다. 양수경의 노래가 왜 이토록 오랫동안 팬들의 정서를 붙잡고 놔주지 않는지 증명한 곡이었다. 그녀의 노래는 장조보단 단조가 많고, 메이저스케일일지라도 가사와 분위기는 모두 슬프다.
김학래가 선사한 ‘알 수 없는 이별’은 양수경의 히트곡 중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그녀의 값어치를 입증하기엔 충분했다. 곡의 형태는 홍키통키와 셔플을 오가며 빅밴드 스타일의 재즈적 냄새를 물씬 풍겼지만 가사와 멜로디는 다분히 성인가요적 성격이 강했다. 즉 한국적 정서를 견지하는 가운데 싸구려 편곡이나 간편한 멜로디가 아닌, 가요적 성향의 팝을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몇 안 되는 가수가 바로 양수경인 것이다.
‘사랑은 차가운 유혹’은 확실히 양수경의 레퍼터리 중 가장 흥겨우면서도 고급스러움을 유지하는 매스터피스였다. 퓨전재즈로 조금 더 현란하게 탄생한 이 곡은 앞으로 양수경의 공연 땐 인트로 혹은 대미를 장식할 유력주자다.
대미는 슬픈 노래만 전문으로 부르는 양수경답게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로 장식했다. 전형적인 발라드로 표현된 이 곡의 첨병은 긴장감과 애잔함을 동시에 보유한 피아노의 타건이었고 주인공은 역시 비탄 고통 절규 등 감정의 심층을 아픔의 표현과 슬픔의 구현으로 토해낸 양수경의 목소리였다.
트로트에 홍진영이 앞서고 조정민이 뒤를 따른다면 소울엔 강력한 박정현이 있다. 누가 뭐래도 이은미와 백지영이 발라드의 여왕이라면 그녀들보다 살짝 선배인 이선희와 양수경은 록과 발라드에 가요까지 아우르는 디바들이다. 아이들이 아이돌에 열광하듯 성인들도 고급스러운 가요를 즐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가수들 덕이다./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