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은빈에게 ‘청순가련’이란 당연한 수순 같기도 했고, 쉬운 길이었으며, 주변의 기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덧 데뷔 18년차를 맞은 박은빈은 돌연 발걸음을 홱 돌렸다. 학생 시절에도 자른 적 없다는 등허리까지 오던 머리칼을 귀 밑으로 바짝 쳤고, 동그랗게 반짝이던 눈은 게슴츠레하게 접었다. 그렇게 아무도 예상치 못하던 JTBC ‘청춘시대’ 속 박은빈의 변신이 시작됐다.
이 도전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따지고 보면 드라마 속 관찰자에 가까웠던 송지원에게는 그 흔한 러브라인 하나 연결되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비밀들도 그저 수수께끼로 남은 상태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은 박은빈의 송지원을 각별히 사랑했다. 배우에게 캐릭터 그 자체로 보이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케이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드라마를 빠져나온 박은빈은 송지원과도, 여태까지 맡았던 작품 속 캐릭터들과도 조금씩 달랐다. 촬영 탓에 자르고는 채 기르지 못했던 단발은 아직 송지원이었지만, 말씨는 얌전하고 차분했다. 하지만 그 속에 의외의 강단과 여유도 엿보였다. 박은빈은 ‘청춘시대’ 종영 후 진행된 OSEN과의 인터뷰에 이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짧은 머리를 해 본 것도 처음이지만, 이렇게 짧은 드라마를 해 본 것도 처음이라는 그는 “12부작이 지치지 않고 타이트하게 집중할 수 있는 기간이었던 것 같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번 여름 정말 더웠지만 다들 즐겁게 촬영했어요. 촬영이 전부 끝난 날 태풍이 불어서 시원해져서 좀 화가 나긴 했죠.(웃음) 종방연에서 ‘우리의 열정이 뜨거웠던 걸로 기억하자’고 농담을 주고 받기도 했고요. 분위기도 너무 좋았고, 저희 (배우들)청춘의 한 단면이기도 했잖아요.”
언급했듯 ‘청춘시대’ 속 파격적인 변신 탓에 주변에서는 송지원과 박은빈이 동일 인물임을 몰랐던 이도 나왔다. 이에 박은빈은 “친척들에게도 전화가 왔다. 저도 거울을 보며 낯설다”며 웃었다.
송지원과 실제 박은빈의 성격이 얼마나 닮았는지도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비슷한 점이 0%라고 생각했는데, 종영한 지금은 송지원에 박은빈을 30% 정도 녹여냈다는 답이 나왔다. 박은빈이 송지원과 비슷해진 부분도 있고, 송지원을 박은빈화 시킨 부분도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전체적 사고방식 같은 경우는 정 반대라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고도 덧붙였다.
“박은빈과는 잠시 이별을 하자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왕 내려 놓을 것 확실히 내려 놓자는 마음이었죠. 당차게 환불을 요구한다거나, 푼수끼가 있지는 않아요. 오히려 그런 부분은 유은재(박혜수 분) 쪽에 가깝죠. 미용실에 가서 머리가 잘 못 나와도 그냥 ‘아… 예쁘네요…’하고 넘어가는 타입이에요.
지원이가 좀 시끄럽긴 하죠. 친구들 말로는 평소 제 모습을 가끔 발견할 때가 있다는데요. 그래서 저도 지원이가 저와 전혀 다르다고는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죠. 지원이의 밝음이나 에너지가 제게 없는 것은 아녜요. 그러나 이를 드라마틱하게 끌어올리려면 충전의 시간이 필요하죠. 그래서 촬영 없을 때는 방출을 위한 충전에 집중하는 편이고요. 수컷의 밤 촬영 때는 거의 혼자서 해야 됐기 때문에 촬영 대기 할 때는 가만~히 있기도 했어요.”
시도때도 없이 음담패설을 남발하는 송지원 캐릭터를 연기하며 적잖이 힘들었을 법했다. 박은빈은 이에 대해 솔직히 부끄러웠지만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며 사는 캐릭터를 만나 신기했다고 밝혔다.
“남녀 커플을 보면서 ‘있는 놈이나 없는 놈이나 소행성 떨어져서 다 죽었음 좋겠다’고 하는 생각, 전 전혀 해 본 적 없거든요. 지원이는 그게 일상이잖아요.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세상에 이런 사고방식으로 사는 사람도 있구나. 방송을 보고 공감해 주시는 부분을 보면서 내 주위에 수많은 송지원을 모르고 살았구나, 했어요.”
극 중 숱하게 등장하는 음주 장면을 떠올리니 문득 주량이 궁금해졌다. 박은빈은 술을 잘 못 마신다며, 드라마 속에서는 거의 무알콜음료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맥주 맛을 제대로 안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대학 시절 ‘남자 송지원’이었다는 이태곤 감독의 도움이 컸다고.
‘청춘시대’의 송지원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듯하면서도 불투명한 인물이다. 학보사 기자라는 직책과 ‘송구라’라는 별명을 함께 지닌 모순적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러나 송지원을 괴롭히던 이명을 비롯해 그가 가진 비밀은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드러나지 않은 채다. 그러나 마냥 까불고 생각 없는 아이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이를 연기한 박은빈의 비호였다.
“저만의 생각이지만, 지원이가 말하는 스스로의 서사가 전부 사실일까 싶었어요. 그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았고, 복잡하고 애매했던 부분이 있었지만요. 송지원의 말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틀린 말은 없다는 것이었어요. 진실과 가까웠던 하얀 거짓말이랄까? 배신감 느끼는 시청자 분들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예를 들어 마지막회 은재에게 부검 관련 거짓말을 할 때, 지원이는 죄책감을 더 지는 대신 은재를 구하잖아요. 그런 부분들을 봤을 때 저는 벨 에포크의 수호천사 같은 역할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현재 서강대학교 사회과학부에 재학 중인 박은빈은 실제 학교 생활에도 매우 충실하다고 밝혔다. 연기 활동에 생긴 공백은 모두 학교에 다니느라 발생한 것들이었다고. 그는 입학 당시 오케스트라 동아리에 바이올린 포지션으로 들어가서 초보들끼리 레슨을 받기도 했다며 미소를 지었다.
박은빈의 연애 이야기를 묻자 “송지원과는 전혀 다르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외로운 것은 둘 다 마찬가지라며 너스레를 떨다가도 드라마 속 임성민(손승원 분) 같은 남사친(남자 사람 친구)은 한 명도 없다는 의외의 변이었다.
상당 부분 편집된 것으로 알려진 극 중 성민과 지원의 러브라인은 끝까지 시청자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던 부분 중 하나다. 예고편 등에서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던 묘한 분위기들이 본 방송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탓이다.
“둘이 잘 안 되면 큰 일 나는 것 아닐까요? (웃음) 한 14회 쯤 잘 되지 않을까 했어요. 제 친구들은 끝까지 안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갑자기 잘 되는 것이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이성간 친구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에 힘이 실리는 것 같아 우울하다면서요. 저도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나중에, 언젠가는…”
박은빈이라면 ‘청춘시대’ 남자 캐릭터들 가운데 누굴 선택하겠냐는 질문에는 “없다”고 즉답해 웃음을 줬다. 이미 송지원 역할에 깊이 몰입했던 그는 벨 에포크 하우스 메이트들이 자매 같았고, 예를 들어 박재완(윤박 분)은 윤진명(한예리 분)의 남자라는 생각이 강하게 박혀 있었다는 것이었다.
160830 박은빈
남자판 ‘청춘시대’가 만들어진다면, 현재의 남자 캐릭터 가운데 어떤 인물이 탐나는지 물었다. 이에 박은빈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남자들 중에 송지원 같은 캐릭터는 없네요. 약간 영화 ‘스물’ 같은 느낌이겠네요? 남성분들도 공감하고 싶으신 게 있으니까… 그래도 여자판이 좋은 것 같아요!(웃음) 남자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로 많이 있으니까, 10대 20대 여성들이 복작복작 사는 내용도 충분히 재밌다고 생각해요.”
박은빈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던 ‘청춘시대’ 마지막회의 부제처럼, 그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그의 화양연화 가운데 송지원이라는 단면을 공유한 시청자들은 이로써 그의 발자취를 쭉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듯하다.
“저 스스로도 송지원을 상상했듯이, 시청자 분들도 상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전국에 계신 많은 지원 분들 곁을 돌아봐도 다른 지원이가 있을 거예요. 제가 하우스 메이트들로부터 힘을 얻었듯, 여러분도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지형준 기자 jpnews@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