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 칼럼 기고] 영화 '덕혜옹주'(허진호 감독)를 둘러싼 역사 미화·왜곡 논란이 개봉(8월 3일) 한 달이 된 이 시점에도 여전히 뜨겁다. 그 요지를 수필가 박영자가 제시한다. “영화 속 영친왕 망명 작전은 실제 역사 속 의친왕 망명 작전에 대한 기록을 참고로 하여 만들어진 허구다. 덕혜옹주가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그려진 것은 재미를 위한 것이라 하지만 역사에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그리는 것은 역사 왜곡의 염려를 떨칠 수 없다.” 그는 덧붙인다. “옹주를 역사 그대로 비극적인 조선의 마지막 옹주로, 비참한 여인의 삶으로 순수하게 그려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동양일보 8월 30일 자 ‘풍향계-비운의 여인 덕혜옹주’ 인용).
꽤 그럴 듯한 지적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러나, 몇몇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가 옹주를 독립운동과 관련 있는 것처럼 그린 것이 그저 재미만을 위한 것일까. “역사 그대로”라고 했는데, 그럴 거면 영화를 만든 이들은 왜 덕혜옹주의 삶을 영화화했을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아니 그게 가능이나 할까. 또 덕혜의 삶을 시대적 함의는 뺀 채, ‘순수하게’ 비참한 여인의 삶으로 그려냈더라면 과연 지금과 같은 대중적 호응을 끌어낼 수 있을까. 그 이전에 순수하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
영화는 시나리오를 완성시키는 데만 4년여의 세월을 바치고 순제작비만 85억 원의 거액을 들인 이유를 제작노트에서 제시한다. “‘덕혜옹주를 아십니까?’ 그녀를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영화 '덕혜옹주'는 역사의 격랑 속에 비운의 삶을 살았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권비영 작가의 소설 '덕혜옹주'를 원작으로 하며,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해 만들어진 팩션(Fact+Fiction)으로 스토리에 활력을 더했다. 특히, 영화 '덕혜옹주'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덕혜옹주’의 불운했던 삶, 그리고 그 속에서도 평생 고국으로 돌아오고자 했던 그녀의 모습을 그려내 올 여름 관객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선사”하겠다고. 영화는 목표한 바의 성공을 상당 정도 거뒀다. 540만이 넘는(9월 1일 기준) 관객이 관람했고, 관람객 평점이 10점 만점에 8.79점에 달하는 지표 등이 그 증거다.
영화 평론가인 내게 시선을 주면 영화 '덕혜옹주'의 성공은 100프로 이상이다. 부족한 시간을 쪼개, 지난 2012년 읽었던 원작 소설을 한 번 더 완독했다. 포스트잇을 붙이고 페이지를 접으며 밑줄을 긋는 등 더 이상 꼼꼼할 수 없을 정도로 꼼꼼히. 영화도 한 번 더 관람했다. 혼마 야스코 저, 이훈 번역 '덕혜옹주 -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역사공간, 2008/2010)도 구입해 부분적으로 읽었다. 이론적 배경이 필요해 역사와 영화의 관계와 연관해서는 국내 1인자라 할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의 '히스토리아, 쿠오바디스 - 탈근대, 역사학은 어디로 가는가'(서해문집, 2016)나 한국사학사학회가 엮은 '21세기 역사학 길잡이'(경인문화사, 2008-12) 등 역사 관련 책들도 들척였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이후 줄곧, 덕혜옹주의 삶과 대한제국, 나아가 한국 근현대사는 내 주된 관심사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덕혜옹주'를 에워싼 작금의 논란을 지켜보면서, 다시금 역설하고픈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영화는 원작을 바탕으로 탄생했다는 것, 소위 정통 사극이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팩션 사극이라는 것, 그리고 저명 영화사가 피에르 솔랭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역사 영화는 모두 허구라는 것이다. '덕혜옹주'는 100만부 이상 팔려나간 원작을 토대로 빚어졌기에 엄밀히는 ‘각색’이다. 헌데 오프닝 크레딧을 보면 원작 다음에 ‘각색’이 아니라 ‘각본’이라고 돼 있다. 허진호, 김현정 등 4인의 이름이 각본가로 나온다. 그것은 영화가 원작을 ‘충실하게’나 ‘느슨하게’가 아니라 극히 ‘자유롭게’, 달리 말하면 ‘창의적으로’ 각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과 영화는 적잖은 지점에서 크고 작은 차이들을 드러낸다.
영화에서는 옹주(손예진 분)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간 이후 1962년 귀국할 때까지 단 한 차례도 조선 땅을 밟지 못한 것으로 돼 있으나, 소설이나 혼마의 책에서는 네 차례 다녀간 것이 그 대표적 예다. 그만큼 일제의 철저한 희생양으로서 덕혜의 비극적 처지를 강조하기 위한 영화적 선택이었을 터. 현실과 소설 속 신문기자 김을한과, 일찍이 고종황제에 의해 옹주의 짝으로 낙점됐었던 그 동생을 김장한(박해일)—감독의 분신임에 틀림없는!—이라는 한 인물로 통합시켜, 일본군 장교로까지 변신시켜가며 옹주의 곁에 머물게 하는 등 옹주를 결국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구원자적 주인공으로 극화시킨 선택도 큰 차이 중 하나다. 덕혜 못잖은 복순(라미란)의 기구한 드라마를 대거 축약·생략·변형시킨 선택하며, 소설 속 기수 캐릭터를 복동(정상훈)으로 변환시켜 그 비중을 대거 높인 선택, 영화적 효과를 위해 의친왕 캐릭터를 완전 삭제시키고 그 실제 인물의 행적을 영친왕의 것으로 이전 시킨 선택 등도 그 차이들이다. 문득 밀려드는 의문. 이 차이들이 역사 왜곡이고 날조인 걸까. 영화만이 아니라 실은 소설도, 나아가 역사도 역사가의 주관적 사관에 의해 좌우되는 일종의 허구적 창작물일진대.
그래서일 테다. 영화 도입부에 '덕혜옹주'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되 ‘순수 창작물’이며, 영화의 내용은 일부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이 천명은 팩션 사극으로서 '덕혜옹주'가 팩트, 사실보다는 픽션, 허구에 방점을 찍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따라서 영화를 감상·평가할 때 더 중시돼야 할 근거는 텍스트 밖의 역사적 사실들보다는 텍스트 안의 논리, 즉 플롯이어야 마땅하다. 영친왕이 실제로 망명을 시도한 적이 없고 덕혜옹주가 독립운동을 한 적이 없다며, 전가의 보도마냥 그 놈의 ‘역사적 사실’에 얽매여 분노할 것이 아니라—그것은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영화의 텍스트내(재)적 논리에서 그런 허구적 설정이 타당한지 여부를 짚는 게 더 바람직한 접근일 것이다.
나도 위 사실쯤은 익히 알고, 영화를 봤다. 내게는 하지만, 영화의 극적 구조나 논리에서 상기 불일치가 거슬리기는커녕, 문제 될 게 없었다. 플롯 상의 설득력이 확보되어서였다. 덕혜는 시종 자의식 강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상황적·환경적 처지로 인해 독립투사적인 삶을 살진 못해도 일제의 강압적이면서도 교묘한 통치를 향해서는 내적 저항을 포기하지 않는다. 고국에 돌아가 한글학교를 세우고 교사로서 삶을 살고 싶다는 꿈도 저버리지 않는다. 영화는 그로써 '명량'(김한민, 2014)이, '광해, 왕이 된 남자'(추창민, 2012)가, '왕의 남자'(이준익, 2005)가 그랬던 것처럼 ‘꿈꾸는 역사’로서 사극으로 비상한다.
이들 영화들에서 공히 최우선적으로 존중돼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역사적·영화적 상상력이다. 그 상상력을 통해 영화는 덕혜는 물론 영친왕, 장한, 복순, 복동 등 인물들에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든 이들의 욕망과 환상을 투영시킨다. 역사상의 인물들에게 결핍됐던 덕목들을 보완시킨다. 그로써 한없이 부끄러웠던 조선의 마지막 왕족들을 덜 부끄러운 존재들로 각색시킨다. 미화, 왜곡, 날조 등의 오해·비판을 각오하고. 그 점은 감독도 기자들과의 미디어데이에서 분명히 밝혔다. "역사 미화 논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고민이 많았다."(머니투데이 스타뉴스 참고). 감독은 덕혜옹주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한 일본인 구체적으로 혼마 야스코가 쓴 역사적 기록 정도를 근거로, “덕혜옹주가 기모노를 입었다”, “덕혜옹주가 연설을 한 적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긴다고도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혼마의 책을 일부 읽는 나 또한 전적으로 감독과 같은 입장이다. 혼마 야스코 그는 “…것 같다”라는 주관적 의견을 심심치 않게 드러낸다. 여기저기서 서술이 흔들린다. 번역상의 오류도 눈에 띈다. 고로 그 저서는 참고용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권비영의 원작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영화 '덕혜옹주'의 레퍼런스일 뿐이지 판단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 점은 원작자도 인정했다. 영화가 오해를 무릅쓰고 ‘순수 창작물’임을 표방한 까닭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어느 사설(중앙SUNDAY 8월 21일∼8월 22일 참고)은 말한다. “영화가 ‘상상력’의 장르라고 하지만 실존 인물을 다룰 때는 무엇보다 ‘기본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방점 필자)고. “스크린의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 대목을 과장할 수 있어도 해당 인물의 성격 자체를 바꾸는 건 자칫 왜곡으로 흐를 수 있다. 대중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데는 성공할지 몰라도 역사에 대한 또 다른 오해를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의한다. 하지만 절반만이다. 상상력의 장르인 영화에서 왜 반드시 상상력보다 기본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인가? 사실을 더 중시하는 팩션 영화의 경우는 위 주장대로 갈 수도 있지만, '덕혜옹주'처럼 허구에 더 큰 방점을 찍을 경우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지 않은가. 팩션 사극을 넘어, '해를 품은 달'처럼 픽션 사극마저 출현하는 이 시대에 말이다.
혹자는 비난한다. '덕혜옹주'처럼 사실을 왜곡할 거라면 덕혜옹주라는 실존 인물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어야 한다, 고. 요즈음 같은 팩션 시대에, 그 역시 절반만 맞는 주장이다.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서 의열단이라는 실존 독립 단체를 내세우면서도, 그 속내를 숱한 허구들로 채우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개인적으로 제기하고픈 것은 대중 관객의 지적 수준에 관한 문제다. 대중(관객)들은 과연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리석을까. 그토록 어리석어서 역사 왜곡이니 날조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어린애들 같은 존재일까. YTN에 했던 인터뷰로 대신하련다. “대중 관객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본인들이 충분히 어떤 채널을 통해서든 학습을 통해서 어떤 것은 사실이고 어떤 것은 사실이 아니고 충분히 조율해 나간다면 이것은 과한 염려라고 봐야죠.”
이 글을 마치려는 이 순간, '덕혜옹주'의 역사 왜곡 논란이 한국사 연구의 새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위 사설의 교훈이 가슴에 더 와 닿는다. 자구적 해석에 사로잡혀, 이승만을 옹호하는 듯한 논리를 끌어들여가면서까지 영화를 비난하는 동료 영화 평론가의 거친 일침보다는…….
[전찬일(영화 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
<사진> '덕혜옹주' 포스터
* 본 칼럼은 외부 기고로 게재됐으며 본지 견해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