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유진모의 취중한담] KBS2 월화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이 일취월장 수준을 넘어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느낌을 줄 정도로 빠르게 성숙하고 있다. 1~2회만 놓고 봤을 땐 하이틴로맨스소설의 사극버전 같아 유치하기 그지없었던 이 성장드라마가 회를 거듭할수록 메시지를 갖추고 철학을 준비하며 조연들로 재미를 더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 안동 김씨 헌(천호진) 등에 의해 왕위에 오른 순조(김승수)는 중전과의 사이에서 영(박보검)을 낳아 세자로 책봉하지만 중전을 일찍 여읜다. 그러자 영의정 자리에 앉은 헌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딸(한수연)을 새 중전에 들어앉힌다.
헌의 손자 윤성(진영)은 영과 죽마고우다. 헌은 내심 이 씨를 물리치고 새 나라를 세울 야욕을 불태우는데 그 첫 번째 왕으로 윤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일찍이 엄마와 헤어져 남자로 살아온 홍라온(김유정)은 저잣거리에서 홍삼놈이란 이름으로 연애편지를 대필해주며 살다 양아버지의 빚 때문에 왈패들에 의해 내시로 팔려간다. 우여곡절 끝에 내시 시험을 통과한 그녀가 영과 윤성 사이에서 삼각구도로 얽히고설킨다는 게 로맨스의 중심이다. 그리고 영의 최고 권력자로서의 홀로서기와 이에 대항하는 헌 일행의 대결구도가 긴장감을 주는 얼개다.
1~2회는 영과 라온과 윤성의 우연한 만남과 끈끈한 인연에 집중하느라 마치 ‘학교’를 조선시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세 주인공 및 나머지 조연들의 캐릭터는 유치하거나 가벼웠고, 대사는 차마 두 귀를 열고 듣기 창피할 정도였다. 라온이 사당패와 어울려 왕과 세손을 풍자하는 장면은 영화 ‘왕의 남자’였고, 뚱뚱한 명은옹주(정혜성)는 영화 ‘미녀는 괴로워’였다.
영과 라온이 서로의 정체를 숨긴 채 들른 국밥집은 각 지역 어딘가에 꼭 있다는 ‘욕쟁이 할머니’ 집이었고, 녹봉이 깎인 내관들이 “거지 X구멍의 콩나물을 빼먹지”라는 대사는 KBS에서 듣기엔 거북스러운 내용이었다. 또한 ‘금수저’ ‘금지된 사랑’(동성애 코드) 등의 대사 역시 지극히 크로스오버된 클리셰로 진지함과는 애당초 거리가 멀다는 자기 정체성의 선언으로 들렸다.
이렇게 로우틴용 만화 같은 전개 탓인지 첫 주 시청률은 한 자리 수에 머물렀다. 그러나 서로의 정체와 성별을 숨긴 채 ‘우정’을 쌓아가던 두 사람이 왕세자만 출입할 수 있는 서고에서 만난 3회부터 달라졌다. 곤룡포를 차려입은 영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던 라온이 신의 한 수였다. 모든 시청자들은 그녀가 영의 정체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예측했겠지만 라온의 대사는 달랐다. “화초서생, 곤룡포를 입으면 큰일 납니다”였다.
그렇게 한 템포 지난 뒤에서 라온은 영의 정체를 인지했고, 이후 드라마는 속도와 무게감을 갖추기 시작했다.
비를 맞으며 영은 죽은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야외로 행차한 영은 뜻하지 않게 비를 만나 당황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신발과 버선을 벗고 맨발로 걸어 나와 비를 맞으며 맨땅을 밟는다. 이에 영이 그러지 말라고 하자 어머니는 “왜요? 중전과 세자는 뭐든지 꼭 준비를 하고 해야 합니까? 우리가 신발 벗고 비 좀 맞으면 국법에 어긋나나요?”라며 세자도 동참할 것을 권한다. 이에 어머니와 함께한 영은 모처럼 세자를 벗고 어린 아이로서의 자유를 입는다. 의관과 격식은 비운의 두 모자를 옭아매는 족쇄였던 것이다.
물론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재미는 “나는 주인, 너는 멍멍이”라고 서로를 모를 때 영이 라온에게 정해준 정체성 놀이에 있다. 이는 장근석 김하늘 주연의 영화 ‘너는 펫’(2011)과 비슷한 구조다. 요즘 젊은이들의 연애는 가볍다고 기성세대는 말한다.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는 만남보다는 그저 지금을 즐기려는 연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성세대들의 눈엔 그게 ‘주인놀이’ 혹은 ‘애완견 놀이’로 비칠 개연성은 충분하다.
영과 라온은 우정인지, 사랑일지 모를 묘한 기운을 풍기며 서로 믿음과 정을 쌓아가는 중이지만 시청자는 이미 그들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사랑’이라고 단정 지었다. 기성세대는 불편할지 몰라도 이 소꿉놀이 같은 애정의 줄다리기는 10~20대들에겐 익숙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어른’들은 모르고 ‘애’들은 아는 게 있다. 왜 ‘애’들이 여기에 열광하는지. 그 답은 날로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연애 결혼 출산의 비율에 있다.
모든 걸 떠나 박보검과 김유정은 10~20대들에겐 아마 올해, 아니 당분간 최고의 커플로 기억될 듯하다. 그만큼 두 사람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썩 잘 어울린다./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
<사진> KBS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