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월화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은 자체적으로 ‘태양의 후예’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성공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지난 16일 스페셜버전을 방송할 정도로 자신감에 넘쳐흐르는 편성이다.
이 드라마는 지금도 그렇지만 초기 방송 때만 하더라도 역사왜곡 혹은 무지와 더불어 유치한 대사와 설정 등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가벼운 재미를 촘촘한 구성과 확장한 얼개로 보완하며 확실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전체의 플롯을 탄탄하게 꿰맞추는 놀라운 상전벽해를 이뤄내는 중이다. 도대체 뭐가 시청자들로 하여금 이 드라마에 미치도록 만드는 것일까?
마치 청소년 성장극 같은 틀에 유치한 대사가 넘쳐난다. 왕세자 이영(박보검)과 천민의 여식으로 태어나 남장을 하고 삼놈이란 이름으로 자라 내관이 된 홍라온(김유정)의 러브스토리가 중심이다. 영은 처음엔 라온이 남자인 줄 알고 그냥 자신을 벗으로 대하는 그 순수함에 이끌려 친근감을 느끼는 가운데 동성애 비슷한 연정을 품게 되다 여자임을 알고 본격적으로 감정에 모든 것을 내맡기게 된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마치 MBC ‘우리 결혼했어요’ 수준의 티격태격 아옹다옹하는 소꿉장난을 보인다. 라온은 그림을 그리며 코에 먹물을 묻힌다.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엿보인다.
휴가를 받은 라온이 저잣거리 장터를 헤매다 영을 만난다. 영이 “기껏 휴가 나와 고작 이러고 다니냐”고 비아냥 거리자 “저 만날 사람 있거든요”라고 응수한다. 영의 역공이 가관이다. “예, 예, 있는 걸로 하겠습니다”다. 1970~80년대 하이틴물이다.
첫 만남이 악연이었던 영과 라온은 주인과 멍멍이 관계로 시작한다. 첫 술자리에서 술에 취한 라온은 자신을 놀리는 영의 손가락을 깨문다. 진짜 개다. 심지어 알 듯 모를 듯 삼놈이란 ‘놈’에게 푹 빠진 영이 어의로부터 동의보감에 있는 과부 여승의 병, 즉 상사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뒤 당황해 “무엄하다, 못하는 말이 없구나. 당장 나가거라”라고 외친다. 학예회다.
청나라 사신에게 끌려갈 뻔한 라온을 영이 극적으로 구한다. 라온은 “이대로 끌려갈까봐 두려웠습니다”라고 고마움을 표시하자 영은 “나도 두려웠다. 늦을까봐”라고 답한다. ‘다모’의 “아프냐? 나도 아프다”가 연상된다.
하지만 이 지천에 널린 ‘초딩 코드’를 상쇄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있으니 그건 바로 정체성에 대한 철학이다.
주요 인물들은 모두 두 가지 이상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거나 애매모호하다. 우선 극에서 중심이 되는 내관들이 바로 그렇다. 그들은 남자라고 하기 민망하고 그렇다고 여자라고 하기는 더욱 어렵다. 성내관(조희봉)은 노골적으로 기시감을 주는 말투로 여성스러운 언행을 일삼는다.
영은 왕세자다. 세상 두려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는 인물이지만 사실 그는 그 누구보다 많이 잃었고, 두려우며, 외로운 사람이다. 어린 시절 실질적인 지배자인 영의정 김헌(천호진)에 의해 어머니가 살해된 상처를 평생 짐으로 안고 살아가는 그는 죽마고우인 김윤성(진영)과 김병연(곽동연)마저도 거리감을 둬야 하는 비운의 인물이다.
공부도 잘하고 무술도 월등하지만 망나니 기질도 다분하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수시로 궐 밖 행차를 하는 그를 라온은 화초서생이라고 부른다. 영은 내관 무관 한량 등 다양한 모습으로 라온 앞에 등장한다. 실제 그 스스로 세자라는 정체성을 확인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다.
윤성은 헌의 사랑을 독차지한 손자지만 할아버지와 달리 영에게 정을 느끼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자신을 멀리하는 영과 벗으로 맺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잘 알고 고뇌하는 젊은이다.
병연은 영이 “만약 내게 딱 한 사람만 믿으라고 한다면 너다”라고 말할 정도로 가까운 친구이자 호위무사지만 사실 순조(김승수)를 가장 위협하는 홍경래의 잔당이 키운 이중간첩이다. 그래서 병연은 영의 순수한 우정과 반란군의 명분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며 아파한다.
여주인공 라온은 홍경래의 딸이지만 자신의 정체를 모른다. 살기 위해 남자로 살아온 그는 우여곡절 끝에 내관이 됐고 영과 윤성의 사랑을 동시에 받지만 아직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정립하지 못한 상태다. 정체는 여자이지만 남자로 살아온 그는 빚 때문에 왈패들에 의해 내관이 됐지만 하시라도 궐을 떠나고 싶어 하다가 어느새 궐 생활이 행복해지는 변화의 인물이다.
드라마는 특히 왕족들을 흠집이 많은 캐릭터로 그린다. 순조는 영보다 더 못난 인물이다. 실제 조선의 왕 중 고종과 쌍벽을 이루는 무능한 왕으로 역사가 평가하는 순조는 왕은커녕 동사무소 직원도 못될 형편없는 깜냥의 못난 인물이다.
명은(정혜성) 공주는 먹고 자고 싸는 게 전부인 뚱보다. 주제도 모르는 그녀는 한 청년이 보낸 연서에 빠져 자기만의 세계 안에 갇혀 지내는 무늬만 공주인 무뇌아다.
그 외의 메시지도 꽤 탄탄하다.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진정한 사랑이 뭣인지 웅변하는가 하면 내관과 궁녀의 금지된 사랑을 정면에 부각시키는 도발도 서슴지 않는다. 마치 ‘뭐가 중헌디?’라는 질문에 곧바로 ‘그것은 사랑’이라고 답하는 듯하다.
영은 순조에게 ‘아무 것도 못하십니까? 아니 안 하십니까?’라고 화두를 던지고 라온은 영에게 “하늘에 닿고자 손을 뻗는 게 아니다”라고 가르친다. 이 촌철살인의 대사는 삶에 멍들고 지친 시청자들에게 투쟁심을 부추기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행진곡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강점은 박보검과 김유정이라는 주인공의 매력이다. 두 사람은 이성은 물론 동성까지 빨아들이는 흡인력을 지닌 몇 안 되는 배우다. 김유정은 소녀에서 숙녀로 훌륭하게 성장했고, 박보검은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마저 실패한 이준기의 확실한 대안이다./osenstar@osen.c.kr
[칼럼니스트]
<사진> '구르미 그린 달빛'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