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엄태구는 송강호와의 연기 호흡을 마치 꿈을 꾸듯 회상했다.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었지만, 그에 따른 부담감도 상당했다. 가만히 있어도 살이 쭉쭉 빠졌다. 그러나 캐스팅 소식에 두려웠다는 것도, 송강호와의 연기 호흡을 앞두고 도망치고 싶었다는 것도 모두 겸손한 표현이었다.
엄태구는 영화 ‘밀정’(감독 김지운)에서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하시모토 역을 맡았다. 송강호가 연기한 이정출 앞에서도 밀리지 않는 포스를 내뿜어야 했던 어려운 역이었다. 결과는 관객의 반응이 말해줬다. 영화가 개봉한 후 ‘하시모토 역을 연기한 배우가 누구냐’는 질문을 던진 사람이 많았으니까.
“살이 빠졌다. 빼려고 한 게 아니라 부담감 때문이었다. 하시모토 역을 제가 하게 됐다는 연락을 받고도 2~3초 좋았다가 두려움과 불안감이 엄습했던 것 같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송강호 선배와 붙는 역할인데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담감이 있었던 것 같다.”
부담감을 뚫고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촬영장에서 쏟아낼 수 있었던 건 다시, 송강호의 배려 덕분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제가 워낙 긴장을 많이 한 게 보이니까 송강호 선배가 재밌게 해주셨다. ‘태구야 괜찮냐’는 말씀을 굳이 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촬영장에서 늘 존중해주시고 배려해주셨다. 끝나면 잘했다고 해주셨다. 그러니까 힘이 저절로 나더라. 덕분에 배우로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감사한 마음이 크다.”
김지운 감독에 대한 고마움도 전했다. 그는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오디션에 합격해 하시모토 역을 따냈던 바. 김지운 감독의 디렉팅 속에서 연기를 펼쳤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자신을 믿어준 감독에 대해 보답하고자 더욱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감독님이 이렇게 믿어주시고 캐스팅해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 됐으면 했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배우 중에 송강호 선배와 연기하려면 무섭고 부담 안 되는 사람 없을 거야’라고 마인드 컨트롤했다. 그런 각오로 현장에 나섰는데 감독님과 선배들이 부담감을 덜고 마음껏 하게 해주셔서 이겨낼 수 있었다.”
연기적으로 이번 현장을 통해 배운 점이 굉장히 많다고 했다. 의욕이 넘쳐 무작정 외웠던 일본어 연기였지만, 송강호의 연기를 보고 다르게 접근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이는 공유도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한 바 있다. 일본어를 그냥 하는 것과 일본어로 연기하는 건 천지차이라고 송강호가 조언했다는 것. 엄태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송강호를 보며 말하듯이 하는 연습을 많이 했다고 했다.
“그렇게 연기하실 줄 몰랐다. 사실 연기가 즉흥적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정말 많이 대사를 반복하시더라. 저도 나름대로 구석에서 몰래 따라해 봤던 것 같다. 일본어 연기도 그랬다. 처음에는 무작정 외웠다. 아무래도 초짜고 까마득한 후배다 보니까 의욕이 넘쳤다. 그런데 송강호 선배를 보면서 정신 차리자고 느꼈다. 기계처럼 일본어만 잘하지 말고 진짜 말하듯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송강호를 롤모델로 꿈꾸는 엄태구이지만, 훗날 그도 송강호와 같은 존경 받는 대선배가 돼 있을지 모른다. 벌써부터 그를 주목하는 눈빛이 전작에 비해 급상승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이서 응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부모님이 뿌듯해 하는 요즘이 그에겐 가장 큰 행복이다.
“아직 따로 계획을 잡은 것은 없다. ‘밀정’ 감독님, 선배들, 스태프들과 다른 작품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막연히 있다. 막연하게 먼 미래를 보자면 이번에 옆에서 봤던 송강호 선배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 / besodam@osen.co.kr
[사진] 박준형 기자 soul1014@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