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유진모의 취중한담] KBS2 ‘수상한 휴가’가 방송이 시작된 지 5달에서 일주일 빠진 지난달 26일 종영됐다. 셀러브리티 친구 둘이 잘 알려지지 않거나 썩 편하지 않은 여행지를 찾아 다분히 고생스러운 경험을 통해 지난 삶을 뒤돌아봄으로써 미래의 동력을 얻는 한편 현지의 녹녹치 않은 각종 생활상을 경험하는 내용은 확실히 ‘맨발의 친구들’ 같은 ‘사서 고생하는 체험예능’과는 달랐다.
현재 예능프로그램의 대세인 리얼리티체험관찰의 포맷을 따르고 있지만 교양적 성격이 강했다. 그래서 한국방송공사란 공영방송의 정체성에 매우 걸맞은 예능이라고 할 수 있다.
종영됐지만 그 아쉬움은 보다 더 예능적인 기능을 강화해 지난 4월부터 방송 중인 ‘배틀 트립’으로 달래는 KBS다. ‘1박2일’도 ‘슈퍼맨이 돌아왔다’도 좋지만 이런 게 진짜 공영방송사, 기간방송사, 재난방송사가 할 예능이다.
요즘 예능 프로그램은 체험 ‘먹방’ 오디션의 세 가지 포맷으로 크게 나뉜다. ‘1박2일’과 ‘무한도전’이 긴 생명력을 잇고 있는 가운데 ‘진짜 사나이’가 뚝심과 뒷심을 발휘하고 있다. ‘먹방’은 유명 셰프들이 판을 깔고 백종원이 통일한 양상이다. 오디션은 ‘K팝스타’와 ‘복면가왕’이 이끌고 ‘판타스틱 듀오’ 등의 엇비슷한 프로그램이 난립 중이다.
예능에서 감동이나 교훈을 얻자는 게 시청자의 목적은 아니다. 시청률이 높은 오락 프로그램일수록 단순하거나 과격하거나 유치하기 일쑤다. 다수의 시청자는 일과를 끝내고 귀가해 노곤한 몸의 피로를 풀고 정신적 긴장을 해소하겠다는 가벼운 생각에 혹은 별다른 놀이문화가 없어 예능이나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이지 그 속에서 지식 교양 철학 등을 얻고자 하는 경우는 드물다. 굳이 들자면 아주 상식적이거나 일상적인 정보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지상파방송사, 그것도 한국방송공사라면 무작정 소비적이거나 말초적이기만 하다면 은근히 즐기면서도 한편으론 실망감을 표시하기 마련이다. 원초적 본능과 도덕적 양심을 어떻게 하면 동시에 만족할까 고민하는 게 인간이다.
그래서 ‘배틀 트립’은 썩 괜찮은 KBS표 예능이다. 형태는 2인1조로 경쟁 팀을 구성해 유사한 주제 혹은 메뉴를 각자 수행한 뒤 판정단의 투표에 의해 승패를 가르는, 비교적 단순한 내용이다. 큰 틀은 여행이지만 전면배치는 ‘먹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종원의 3대 천왕’처럼 특정 식당홍보 프로그램이란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여행지가 국내든 국외든 작위적이지 않은 데다 살짝 판타지까지 들어있어 ‘걸어서 세계 속으로’와 ‘한국인의 밥상’을 한꺼번에 보는 효과를 낸다.
‘백종원~’과 ‘배틀 트립’의 사회자가 이휘재란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백종원~’은 제목에서 보듯 백종원이 주인공이다. 이휘재가 김준현을 이끄는 선두 MC의 형태지만 시작 때부터 지금까지 존재감이 약하다는 지적이 잦다.
그도 그럴 것이 이휘재는 정통 개그맨이 아닌, 제작 스태프 출신의 ‘야인’이다. 그는 1990년대 이홍렬 이영자 등과 함께 MBC의 예능천하를 이뤄낸 일등공신으로서 ‘롱다리’란 별명답게 당시 개그맨들에게선 보기 힘든 잘생긴 얼굴에 늘씬한 몸매의 비주얼로 여성 팬들을 사로잡았던 예능인이다.
그래서 그가 가진 웃음의 무기는 외모를 망가뜨리는 것, 귀엽거나 섹시한 이미지를 부각하는 것, 그로 인해 발생한 바람둥이 루머를 최대한 전면에 부각하는 것 등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도 40대 중반의 나이에 ‘슈퍼맨~’에서 보여준 대로 피곤이 쌓인 가장이다. 더 이상 예전의 방정맞거나 애교스러운 언행으로 시청자를 만나는 건 실례다. 그 결과 연기로 따지면 정극스타일을 지키려 하는 게 그의 진행패턴이다. 당연히 ‘백종원~’을 이기지도, 프로의 내용과 잘 어울리지도 못할 수밖에.
반면에 ‘배틀 트립’에선 ‘동물농장’의 신동엽 같은 절제된 진행이 먹힌다. 지난 연말 연예대상에서 자신은 예능인이 아니라며 시상식장 참석을 거부했던 백종원은 그 말이 무색하리만치 ‘백종원~’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뛰어난 예능감을 뽐낸다.
그러나 ‘배틀 트립’의 스튜디오에 이휘재와 함께한 이숙 성시경 산이는 매우 점잖은 편이다. 심지어 이숙은 개그맨임에도 불구하고 ‘언니들의 슬램덩크’와는 사뭇 다른 정적인 모습이다. 이는 여행의 주인공인 경연팀들을 최대한 부각시키고 그들의 경험을 프로그램의 첫째 재미로 삼기 위한 계산된 절제로서 매우 현명한 판단이다. 현재의 이휘재는 그런 흐름에 전형화돼 있다.
‘백종원~’이 성공한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앞장세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서민적이고 친숙한 메뉴를 초반부터 포진했다는 점이다. 그건 예능감이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아직도 롱런 중인 이연복 셰프가 ‘중국집 주방장’이란 사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러 프로그램들이 중식 명장과 일식 명장을 다뤘지만 상대적으로 중식 셰프가 오래가는 이유다.
‘배틀 트립’도 그런 센스를 발휘한다. 서민이 식당에 갔을 때 가장 흔한 고민이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혹은 ‘물냉면이냐, 비빔냉면이냐’다. 오죽하면 짬짜면이란 메뉴까지 나왔을까? 값싼 분식집이라면 둘이 갔을 경우 어묵 떡볶이 순대 등을 다양하게 시켜도 일반식당 대비 가성비가 앞서지만 요즘 서울시내에서 냉면이 1만원이 훌쩍 넘고 짜장면도 5000원씩 하는 경제조건에서 ‘배틀 트립’의 노림수는 분명히 영특했다.
동물에겐 사색이 있을 수 없겠지만 사람들은 존재의 이유를 고민한다.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삶을 살며, 매번 비슷한 식사를 하고 심지어 라면 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삶 속에서 ‘내가 이러려고 그토록 치열하게 사나’라는 고민을 한번쯤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배틀 트립’은 매우 현실적이어서 좋다. 다른 예능처럼 ‘1만원으로 어디 다녀오기’ 등의 매우 비현실적인 여행이 아니라 시청자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자신을 대입하기 안성맞춤인 ‘실생활형 먹방여행’이라 눈과 침샘이 호강하고, ‘방송 뒤 어떤 식당이 대박이 났다’라는 의심의 구린 뒷맛이 없기에 살갑게 와 닿는다./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