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유진모의 취중한담]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의 근간 혹은 논쟁의 중심에 서온 변증법은 쉽게는 ‘진리를 결론으로 추구하는 모순의 논리학’으로 불린다. 그런 유럽인들의 정서를 지배하는 것 중의 큰 줄기는 그리스-로마 신화다.
그건 동양인들에게도 마찬가지. 각 국가와 민족의 정서의 바탕엔 설화와 신화 등이 엄연히 존재한다. 거기엔 샤머니즘 토테미즘 애니미즘 등이 밀접한 관계로 연계돼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첨단 디지털 시대인 지금 토속신앙은 어느새 ‘미신’으로 폄훼됐고, 다수의 사람들은 소수의 유력종교에 광분하지만 그 외의 종교는 이단시하는 이율배반이자 아전인수로 인한 자가당착에 빠져있다. 물론 신화와 과학은 대척점에 서있다. 전설과 신화가 매우 비현실적인 것은 맞다. 하지만 사람들은 특정 신이 절대가치다. 이런 아이러니!
신화가 사람에게 원하는 것은 신격화가 아니라 선험적 교훈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수많은 문화와 예술 심지어 산업까지도 신화와 가까이 지내려 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한국영화사상 매우 독특한 ‘가려진 시간’(엄태화 감독, 쇼박스 배급)은 ‘구미호’나 ‘월하의 공동묘지’와는 다른 차원에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신비한 동물사전’에 뒤이은 흥행 2위는 색다른 한국영화에 대한 관객의 갈망이 드러난 좋은 예다.
주인공은 외딴 섬 초등학교 6학년 성민(이효제, 강동원)과 수린(신은수), 그리고 시간이다. 그들 사이에 끼어든 시간의 조절자는 ‘요괴 알’이다. 마을에는 시간을 먹는 요괴에 대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는데(신화) 성민과 세 친구가 우연히 발견한 요괴 알을 실수로 깨뜨림(손님접대 의식-내면의 외화)으로써 세상의 시간이 멈춘 채 성민들만 자라 성인이 된다.
성민들에게만 흐르던 시간이 제 자리를 찾아 이 세상으로 되돌아왔을 때 그 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오랜 시간은 수린과 세상에겐 그냥 순간적인 시각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성민의 친구들은 사고로 죽거나 멈춘 시간 속에서 사는 게 괴로워 자살했다. 그리고 어른들은 낯선 성민을 그들의 유괴살인범으로 모는 것도 모자라 은수에게 집착하는 아동성애자로 왜곡해 ‘제거’하려한다. 어쩌면 대중이 신화를 믿게 되면 ‘통치체계’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서가 아닐까?
이 영화는 믿음에 대한 신화다. 성민의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가 “넌 잘 자랄 수 있을 거야”라고 거짓말을 하며 보육원에 맡겼다. 성민이 세상과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버지를 잃은 뒤 어머니의 재혼으로 계부를 맞았으나 어머니의 석연찮은 죽음 뒤 계부와 마뜩잖은 불편한 동거를 해야 했던 수린이 마음을 여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은 자명한 사실. 계부는 나름대로 수린에게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고 했지만 그 저의는 사회적 시선에 대한 염두에 불과했다. 성민의 존재가 사실임을 호소하는 수린을 무시한 채 막무가내로 집에 가두고 문에 못을 박는 그의 행위는 기성세대가 자식세대와, 혹은 권력자가 민중과 대화하려하지 않고 무작정 짓누르려는 억압적 폭거에 다름없다.
그렇게 믿음을 잃어버린 수린은 같은 처지의 성민에게 입을 맞추며 “배신하면 죽일 거야”라고 협박이 아닌, 애원을 한다. 그건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으면 죽이겠다는 게 아니라 죽겠다는 의미다. 성인이 돼 나타나 어른들에 쫓겨 벼랑 끝에 몰린 성민을 수린이 안타까워하자 성민은 “괜찮아, 너만 내가 성민인 줄 알아주면”이라고 말한다. 왜냐면 성민은 자신을 알아줄 것으로 기대했던 어른들 중 마지막 보루인 보육원장 ‘엄마’가 최소한의 확인조차 없이 무조건 이단시했기에 이제 수린이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동화는 어린이의 아름다운 동심을 키워주기 위해 만든 산문문학이자 각종 설화를 재구성한 또 다른 신화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우화는 풍자와 교훈이 강하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바로 어른들을 위한 ‘잔혹우화’다.
애들보다 현명하지 못하고, 애들보다 판단력이 흐리며, 애들보다 상상력이 부족한 어른을 상대적으로 비웃으며 신화를 멀리하는 정신세계와 동심을 우습게 치부하는 사회구성 체계가 얼마나 허술하고 이기적이며 일방적인가 조롱한다.
스토리와 그 속에 담긴 메시지와 철학과 신화마저도 훌륭한데 비주얼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믿고 보는 강동원의 매력이 거지꼴마저도 패션으로 승화시키는가 하면 신은수가 벌써부터 대형 여배우로 성장할 강한 잠재력을 보이니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한국 장편상업영화로 손꼽기에 손색이 없고, 그래서 엄태화 감독의 향후 행보에 눈길이 간다./osenstar@osen.co.kr
<사진> 영화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