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유진모의 취중한담]지난주 지상파방송 3사는 일제히 새로운 수목드라마를 내놨다. 예상대로 SBS ‘푸른 바다의 전설’이 15%대의 압도적인 시청률로 저만치 치고 달아난 가운데 3%대의 MBC ‘역도요정 김복주’가 꼴찌로 허덕이고, 6%대의 KBS2 ‘오 마이 금비’가 중간에서 균형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이번의 구도는 숫자만으로 단순하게 비교평가하는 것은 실례인 듯하다. ‘역도요정 김복주’에 대해 온통 호평일색인 가운데 나약한 캐스팅 때문에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오 마이 금비’에 대한 찬사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푸른 바다의 전설’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이 매우 큰 점은 한류열풍의 양면이다. ‘상속자들’로 최정상 한류스타에 등극한 이민호와 ‘별에서 온 그대’로 제2의 전성기를 연 전지현이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을 크게 증폭시켰기에 실망과 충격이 복리로 계산된 듯하다.
첫 회부터 스페인의 아름다운 바다와 중세의 풍광을 담으며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지만 그게 다였다. 벌써부터 ‘상속자들’과 ‘별에서 온 그대’의 짬뽕이란 조롱이 쇄도하고 있다. 이민호와 전지현의 캐릭터와 연기패턴 역시 그 작품들과 판박이여서 전혀 새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지적은 심각하게 고민해야할 숙제다.
벌써 주인공인가 싶을 정도로 낯선 이성경과 남주혁을 앞세운 ‘역도요정 김복주’는 잘못하면 ‘우리 결혼했어요’가 될 뻔했으나 엘리트체육의 잔인한 속성을 교묘하게 유머로 비틀며 치열하지만 페어플레이가 먹히지 않는 대한민국의 벼랑 끝에 내몰린 젊은이들의 성장통을 담아 빠르게 진행돼 신선하다. 향후 ‘푸른 바다의 전설’의 10~20대 시청자들을 일부 빼앗아올 것이 예상된다.
‘오 마이 금비’는 한마디로 괴물이다. 오지호와 박진희라는 베테랑을 포진하긴 했지만 제목대로 작품의 주인공은 금비고, 그 책임은 배역처럼 실제 만 9살인 허정은에게 있다. 이 잔인한 상황을 허정은은 단 2회만에 전지현을 위협한다는 다수 매체의 평가를 받을 정도로 꿋꿋하게 헤쳐 나가고 있다.
엄마 얼굴도 모른 채 이모(길해연)의 손에 자라던 금비는 어느 날 갑자기 이모가 아빠 모휘철(오지호)의 주소만 남겨두고 사라지자 주소지를 찾아간다.
공길호(서현철) 허재경(이인혜)과 함께 고미술품 사기로 살던 휘철은 위작사건에 연루돼 수감된 상태. 길호는 금비를 이용해 휘철을 선고유예로 빼낸다. 출소 날 주머니에 돈 한 푼 없는 휘철은 배가 고프다는 금비를 데리고 무작정 뷔페식당으로 가 배터지게 먹은 뒤 무전취식을 합리화하기 위해 금비에게 꾀병을 주문한다. 금비는 이를 무시한 채 옆 테이블에서 남자친구와 식사 중인 고강희(박진희)에게 타로점을 쳐준 뒤 복채로 10만 원을 받아내 유유히 위기에서 벗어난다.
사기꾼인 휘철에게 금비는 단지 짐일 따름이다. 하지만 떼어낼 경우 재수감될 것을 우려해 어떻게든 보육원에 보낼 음모를 꾸미지만 웬일인지 금비는 보육원이라면 치를 떤다.
휘철은 금비를 ‘금비 어린이’라고, 금비는 휘철을 ‘아저씨’라고 각각 부른다. 그들은 서로 부녀지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하면서도 왠지 모를 본능 혹은 동병상련에 이끌리는 것을 숨길 수 없다.
강희는 동생을 잃는 과정에서 부모와 오빠 등과의 가족관계가 깨졌고, 딸마저 잃은 복합적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 우연히 만난 금비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기에 우연히 재회한 뒤부터 마치 친딸처럼, 친동생처럼 보살펴준다.
휘철 일당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고미술품을 다량 보유한 강희에게 사기를 치려다 그 음모를 알아챈 금비가 나타나는 바람에 실패한다. 그러자 휘철은 금비를 떼어내기 위해 길호의 집에서 쫓겨난 것처럼 꾸며 노숙을 전전한다. 휘철이 돈이 없어 배를 곯는 것처럼 연기하자 금비는 학교에서 점심 때 급식으로 받은 돈가스와 우유를 안 먹고 가져와 휘철에게 준다.
‘최순실 게이트’에서 보듯 사실 우리 사회 여러 곳은 곪은 차원을 넘어 썩을 대로 썩어있다. 물이 지나치게 깨끗하면 물고기가 못 산다는 말은 플랑크톤이 살 정도의 환경이 되란 역설이지 적당히 혼탁해도 된다는 억지는 아니다.
그러나 금비가 태어난 세상은 이미 심하게 부패하고 오염된 환경. 아버지도 모른 채 태어난 금비를 엄마라는 사람은 조금만치의 책임감이나 양심이나 모성애도 없이 지인에게 버리듯 떠넘겼다. 천륜이 무너질 정도니 뭔들 온전할까?
학교에서 부잣집 딸인 한 급우는 대놓고 금비를 못살게 굴고 업신여긴다. 그러자 정작 금비가 힘든 배경은 그런 ‘정유라’식의 어긋난 우월의식이 사회에 팽배해서라기보다는 애초부터 산산이 부서진 채로 태어난 자신의 동심 때문이다.
친구들이 어제 소고기를 먹었나, 스테이크를 먹었나로 설전을 벌일 때 그녀는 주린 배를 남몰래 움켜쥔다. 시선의 탄착점이 다르다. 배려와 인간미와 나눔 정신이 사라진 세상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자기방어일 따름이다. 그런데 그 방식이 휘철처럼 반발에서 비롯된 합리화와 반동의 방어기제가 아니라 정직과 신념이란 점에서 확연히 다르다.
강희에 대한 금비의 타로점 결과는 “갈 길은 보이는데 목적지가 어딘지 몰라요. 마음은 가라고 하는데 걸음은 안 떨어져요. 가기 싫은 건지, 발목이 묶인 건지 자기도 잘 몰라요. 떠나면 소중한 걸 놓치게 되고, 머물면 많이 울게 될 거예요”였다.
그런 사람은 강희인 동시에 금비 자신이기도 하고 휘철일 수도 있으며 수많은 대중일지도 모른다. 금비와 휘철은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고 원하지도 않았던 뜻밖의 부녀관계라는 상황이 유발한 현기증 때문에 혼란을 겪으며 당황한 상황.
특히 정상적인 삶과 등을 돌린 휘철은 이것저것 따지다가 애써 부정하더니 자신의 딸일지도 모를 금비에 대해 친자확인을 하기는커녕 보육원에 보낼 음모만 꾸미는 비정하고 비열한 면모를 보인다.
어린아이 같은 휘철에 비해 금비는 어른스럽다. 그녀는 이런 관계와 상황을 부정한다거나 의심한다거나 큰 도약의 발판을 꿈꾸는 어리석은 생각을 안 한다. 그렇다고 완전하게 받아들여 아빠에게 순응함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편안하고자하는 얄팍한 지략을 펼치지도 않는다.
그냥 현실을 순수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경제적인 결핍을 추상적인 과잉으로 메우고자 하는 패착의 가능성의 원천을 봉쇄한 채 상징성의 꼭짓점을 향해 차근차근 계단을 밟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녀는 이 시대 어른들이 배워야할 어린아이의 때 묻지 않은 태고의 간명직절한 삶의 철학과 처세를 보여준다.
KBS2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영의정 김헌(천호진)의 겁박에 충격을 받아 말을 잃은 영은 옹주 역을 맡아 대사 한 마디 없이 야무진 감정연기를 펼쳐 박수갈채를 받았던 허정은의 존재감은 눈이 부실 만큼 빛난다. 캐스팅이 흥행의 열쇠인 것은 맞지만 흥행 완성도 만듦새까지 전 분야의 전가의 보도는 아니라는 걸 호통 치는 듯하다. 게다가 어른을 꾸짖고 촛불을 드는 아이가 생기는 혼탁한 세상을 투영한 설정은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 맞긴 맞나보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osenstar@osen.co.kr
<사진> '오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