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유진모의 취중한담]1987년 11월 2일 신문 한 구석엔 전날 작곡가 겸 가수 유재하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기사가 자그맣게 실렸다. 당시 만 25살을 갓 넘긴 나이였고, 데뷔앨범을 낸 지 1달여 밖에 안 된 상황.
당연히 관심이 크지 않을 수밖에. 하지만 현재 고인이 가요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마어마하다. 그의 이름을 딴 음악경연대회가 열릴 정도고, 수많은 뮤지션들이 천재성을 칭송하고 있다. 그리고 다소 뒤늦게 그의 죽음과 음악을 모티프로 한 영화 ‘사랑하기 때문에’(주지홍 감독, NEW 배급)가 나왔다.
유재하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만든 음악이 기존 가요의 형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재즈는 물론 클래식의 작법을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는 흔히 발라드라고 생각하지만 댄스 록 블루스 재즈 심지어 트로트로도 전환이 가능하다. 이런 가요는 거의 전무하다.
유재하가 앨범을 낼 당시 가요계에선 스타 가수나 작곡가보다 편곡가가 더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이 젊은 싱어 송라이터는 직접 편곡을 해냈다. 요즘 얘기하는 프로듀싱은 편곡, 음악감독은 편곡자다.
30대의 작곡가 이형(차태현)에겐 사랑하는 연인 현경(서현진)이 있다. 현경은 한때 ‘홍대 버스킹의 여신’으로 불리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었지만 무대공포증 탓에 번번이 방송데뷔에 실패한다.
이형은 그녀를 위해 ‘사랑하기 때문에’를 특별하게 편곡해 놨다. 그리고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승용차를 몰고 가던 중 트럭이 운전석을 들이받는 바람에 혼수상태에 빠진다.
정신을 차린 그는 여고 3년생 말희(김윤혜)의 몸에 들어온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말희는 동급생 요셉의 아이를 임신 중이다. 당황한 이형을 유일하게 알아봐주는 사람은 동급생 스컬리(김유정).
요셉과 말희는 원래 아이를 낳고 결혼하기로 약속했지만 남자의 정신으로 아이를 낳을 게 끔찍한 이형은 스컬리의 도움을 받아 낙태수술대 위에 오른다. 그러나 요셉의 진심을 깨닫는 순간 이형의 정신은 말희의 몸에서 빠져나와 형사 찬일(성동일)의 몸에 들어간다. 이후 그는 말희의 담임선생 여돈(배성우), 치매에 걸린 할머니 갑순(선우용여) 등의 몸을 넘나들며 그들의 사랑에 관여하게 된다.
과연 이형은 언제쯤 자신의 육체 속으로 들어가게 될까? 아니, 살 수나 있는 것일까?
연인을 만나러 가던 길에 교통사고로 죽은 유재하의 마지막 날부터 시작된 이 영화는 매우 버라이어티하게 진행된다. 판타지로 시작된 초기의 코드는 코미디다. 차태현이야 귀여운 코미디의 보증수표고, ‘구르미 그린 달빛’으로 증명된 김유정의 매력이 제대로 코미디로 폭발한다.
여기에 차태현의 ‘용띠 친구’ 장혁과 홍경민, 그리고 조달환의 카메오 출연이 덤으로 재미를 더해준다.
다음은 사회문제를 연계한 멜로와 미스터리다. 서두부터 고교생의 성문제를 화두로 던진다. 성관계부터 낙태수술이 과연 미성년자인 여고생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인지 묻는다.
더불어 청소년 자살문제까지 건드린다. 말희의 몸속에 들어간 이형은 사랑한다는 요셉에게 “죽어버려”라고 말한다. 그러자 요셉은 “그래 죽을게. 어차피 나 죽을 거였잖아”라고 답한다.
자살하려던 외톨이 요셉을 살린 사람이 말희였고, 그래서 말희 몸속의 아이는 요셉의 전부다. 말희가 전교 1등의 모범생이란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범생도 사랑을 할 권리와 섹스를 하고 싶은 말초신경이 있단 얘기다. 사랑과 욕망의 관성의 법칙을 ‘나만 로맨스’라는 아전인수(이기심), 견강부회(무리수)로만 보는 어른들에 대한 일침이다.
중년 형사 찬일의 이혼 위기와 전형적인 배 나온 ‘아재’ 여돈의 ‘여신’급 여자친구의 비밀은 지나치게 전형적이라 살짝 하품이 나온다. 갑순의 첫사랑은 기존 영화에서 써먹었던 형식이라 실망스럽다.
하지만 찬일의 “이혼에 찬성하느냐”는 질문에 어린 ‘딸’이 “우리 유치원에 부모 이혼한 애 많아. 싸우는 거보단 낫지”라고 답하는 내용은 어른들에게 싸늘한 경종을 울린다. 초기에 스컬리가 “연인들이 언제 헤어지는지 아나? 신비감이 떨어질 때지”라고 던진 교훈 역시 당연하지만 새삼스럽다.
차태현 영화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모든 배우들이 제각각 제몫을 해낼 정도로 고른 비중을 차지한다. 다양한 재미를 제공한다는 의미다. 굳이 콕 집으라면 전반은 김유정이, 후반은 서현진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구르미 그린 달빛’으로 성인 여배우로 우뚝 선 김유정과 ‘낭만닥터 김사부’로 요즘 가장 주가가 높은 서현진을 한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1만 원의 값어치는 충분하다.
고대 중국은 ‘오랑캐는 오랑캐로써 무찌른다’고 했고, 이 영화는 ‘상처받은 사랑은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한다. 더불어 유재하에 대한 헌사를 잊지 않는다. 현경은 “유재하는 음악으로 살아있다”며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각각 남긴다’는 옛말을 잇는다.
사랑이란 결국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자웅동체 자식 헤르마프로디테처럼 서로의 반쪽 찾기란 상투적인 결론을 내리지만 그 매개체가 분명해서 좋다. 요셉과 말희의 그것은 소외감이고, 이형과 현경은 두려움과 음악이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혼자되는 것을 겁내기 마련이지만, 조용한 고독에 대한 탐미도 즐길 줄 안다.
여돈의 첫사랑은 “세월이 지나니까 다 변했어, 흉하게”라고 푸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랑은 이뤄진다. 그건 그들이 순정을 매개로 한 만족의 눈금을 찾았고, 그건 결국 고독보다 감미롭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혼 재판을 앞둔 찬일 부부, 자신을 첫사랑이라고 갑순에게 속이는 할아버지의 죄책감 등이 모두 해소되는 것과 동일선상에서 인생의 의미와 사랑의 징표를 웅변한다. 그건 ‘사랑하기 때문에’다. 그래서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면 사랑도 이별도 모두 운명이니까.
유재하의 유작은 비록 앨범 1장이지만 전체가 다 마스터피스인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은 점은 매우 아쉽지만 한숨과 분노로 얼룩진 한해를 보내고 맞는 새해 1월4일에 이런 유쾌하고 상쾌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은 분명히 반갑다. 12세 이상 관람 가./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
<사진> 영화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