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유진모의 취중한담]2014년 11월 개봉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가 해를 넘겨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사실은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아바타’의 그 기록과는 좀 의미가 다르다. 두 작품이 가진 메시지와 영화적 예술성을 떠나 아주 단순한 재미 면에서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흥행에는 ‘선과 악’ 같은 대칭구조가 필요하다. 멜로영화에도 주인공 사이의 갈등구조가 당연시되고 심지어 ‘도깨비’의 박중헌 같은 ‘절대적인 악’까지 필요할 정도다.
‘인터스텔라’에 잠깐 만(맷 데이먼)이란 악의 요소가 등장하긴 하지만 주제에 간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토리를 매끄럽게 이어가기 위한 보조장치였을 따름이다. 그런 시점에서 테드 창의 단편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긴 ‘컨택트’(원제 ‘Arrival’, 드니 빌뇌브 감독, UPI코리아 배급)는 악의 존재 없이 주인공의 활약과 스토리의 힘만으로 이끌어가는 보기 드문 SF적 장치의 혁명적 철학영화다.
어느 날 갑자기 전 세계에 12개의 셸(UFO)이 도착(arrival)한다. 각국은 대화도 제스처도 없이 외계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침묵만 지키자 긴장한다. 미국 정부는 그들이 왜 지구에 왔는지 목적을 알기 위해 세계적인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애덤스)와 물리학자 이안(제레미 레너)을 군작전팀에 합류시킨다.
셸에 들어간 이들은 7개의 다리를 가진 문어 같은 외계생명체를 만나 헵타(7)포드(다리)라 명명한다. 루이스와 이안은 이 생명체가 발끝에서 뿜어낸 기체로 만든, 마치 먹물을 잔뜩 머금은 붓이 그려낸 원 같은 도안이 이들의 언어라는 것을 알고 연구한 끝에 해독할 수 있게 된다.
루이스와 이안은 최소한 그들이 지구인에게 해코지를 하기 위해 방문한 게 아님을 깨닫고 그들과 소통하려 무진장 노력하지만 정부의 생각은 점점 그들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특히 호전적인 중국과 러시아는 전쟁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소재는 언어고, 주제는 소통이다. SF의 고전인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인류의 조상은 동물의 뼈 등을 도구로 사용하면서 비약적인 진화의 물결에 탑승하게 된다. 그리고 문명을 창조하는 데 여기엔 언어가 필수였다.
이렇게 언어는 교류와 화합의 연결고리인 동시에 반목과 전쟁의 계기이기도 하다. 언어가 다르거나 같은 음이나 형상을 해석하는 시각이 다르면 다툼으로 이르기 일쑤다. 루이스는 18세기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해 원주민에게 “저 동물이 뭐냐”고 물었고, 원주민이 “못 알아듣겠다”라는 의미로 “캥거루”라고 말한 게 그대로 동물이름으로 굳어졌다는 속설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원주민은 진화된 외래종족에게 몰살됐다고 결론 내린다.
루이스는 딸이 한 명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하나(Hannah)였다. 그런데 어른이 되기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루이스는 내내 하나와의 추억과 그녀에 대한 죄의식에 휩싸여 괴롭거나 후회스럽거나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이 영화는 이래저래 ‘인터스텔라’와 비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터스텔라’의 소재는 상대성이론과 중력이고 주제는 ‘가정을 버리지 말고 가족을 지켜라’, 즉 ‘Stay’다. 수많은 아버지와 엄마는 돈을 벌겠다고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명목은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그들에게 보다 더 큰 행복을 주겠다는 것이지만 사실 그건 자신들의 출세욕이나 명예욕 혹은 이기심 때문은 아닐까? ‘인터스텔라’의 쿠퍼는 인류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명분으로 어린 딸 머피의 손을 뿌리치고 우주로 나아갔지만 결국 미래의 그는 과거의 자신에게 ‘스테이’라고 외친다. 지구를 구한 사람은 그도 나사(NASA)도 아닌, 자신을 붙잡던 머피였다.
어린 머피는 쿠퍼에게 “왜 하필 내 이름을 머피로 지었냐”고 따진다. 그러자 쿠퍼는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뜻이라고 설득한다. 긍정의 처세술이다.
그건 하나와 평행이론이다. 하나 역시 루이스에게 왜 이름을 이렇게 데칼코마니처럼 지었냐고 묻고 루이스는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두 영화의 가장 닮은꼴 DNA는 상대성이론이다. ‘인터스텔라’에서 쿠퍼는 불과 몇 년 사이에 80여년을 살고, ‘컨택트’에서 루이스와 이안과 하나는 십수 년의 과거 현재 미래를 뒤섞여 산다.
시간 공간 차원 등은 보는 사람에 따라, 운동하는 위치와 속도와 관성에 따라 각자 다르다는 의미다.
원제 ‘도착’은 또 다시 ‘인터스텔라’와 합쳐진다. 헵타포드는 루이스의 “왜 왔느냐?”는 질문에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분명하게 평화의 목적임을 밝힌다. 그 이유는 “3000년 뒤엔 인류가 우리를 도와야 하기 때문에”다.
이는 ‘인터스텔라’의 시간과 공간의 왜곡이다. 지구시간으로 수십 년을 우주에서 수년간 보낸 쿠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블랙홀에 스스로 빠지자 그가 놓인 환경은 사방팔방이 온통 머피의 지난 세월 속의 공간들인 5차원이었다. 여기선 시간도 시각도 공간도 차원도 기존의 얄팍한 이론이 무의미했다.
그래서 ‘컨택트’는 소통을 모든 생명체가 가장 소중하게 지켜야할 덕목으로 손꼽길 주저하지 않는다. 언어가 아니라 그 어떤 공통의 감정이 교류할 수 있는 소통이다. 루이스는 “외계인과 게임으로 소통하면 그들은 적 승리 패배란 개념만 배우게 될 것이고, 우리가 그들에게 망치를 주면 그들 눈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언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교류하는 소통의 방식이 절대적이란 메시지다.
외계인이 처음 루이스에게 한 말은 “무기를 주다”다. 한국어나 영어엔 시제가 있지만 중국어엔 없다. 외계어에도 시제가 없다. 그들의 글 역시 소리와 무관한 표의문자다. 모든 글자가 원을 기준으로 하지만 그 둘레의 디테일이 전혀 다른 의사로 표현된다.
이는 우리나라 유행가 가사처럼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시각적 청각적 효과와 유사하지만 결국 글자 자체의 모양과 느낌보단 말을 하는, 즉 소통하는 사람들 간의 감정이 화합과 따뜻한 교류의 원천이란 의미의 강조다.
‘인터스텔라’의 마지막 장면에서 노쇠한 머피는 자신의 임종을 지켜보려는 쿠퍼에게 “어떤 부모도 자식이 죽는 걸 지켜봐선 안 된다”며 떠나달라고 부탁한다. ‘컨택트’에서 루이스는 하나를 암으로 떠나보낸 게 그렇게 가슴 아파 괴로웠지만 행복을 되찾는다. 쿠퍼는 “부모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 유령 같은 존재가 된다. 부모가 사는 건 자식의 기억이 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루이스는 “추억은 생각과는 다르게 기억돼. 무기(진정한 소통)는 시간을 연다”고 말했다. 한 헵타포드가 안 보여 루이스가 안부를 묻자 동료는 “죽어가는 중”이라고 답한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순간 죽어간다.
우리 중학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는 유교의 이념을 가르친다. 결국 가족을 사랑하고 지키는 게 모든 일과 철학의 중심이란 뜻이다. 루이스를 그토록 믿고 따랐던 하나가 사춘기가 돼 엄마와 멀어진 이유는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암세포 때문이 아니라 일에 몰두하느라 자신을 그렇게 되도록 방치한 ‘바쁜 엄마’ 때문이었던 것이다. 인류를 구하겠다고 우주로 나아가는 쿠퍼를 머피가 “안 돌아올 것”이라며 원망했던 것처럼. 116분. 12세 이상 관람 가. 2월 2일 개봉./osentar@osen.co.kr
[칼럼니스트]
<사진> 영화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