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쎈 초점] 아카데미와 블랙리스트, 이변과 이변없음
OSEN 엄동진 기자
발행 2017.02.27 16: 29

 정치에 무관심한 국민, 정치에 무감각한 문화인. 끔찍하게 들리지만, 어찌 보면 부러운 일이다.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는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표자가 맡고, 국민은 생업에 종사하면 된다. 그렇게 살아야 간신히 먹고 사는 세상이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죄악으로 읽히지만, 대리인들의 정치권력이 올바르게만 작동한다면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축복이다. 
대중예술 문화계로 범위를 좁혀놓고 보자면 문화인이 정치에 민감할 때, 정치권력이 한참 잘못 작동되고 있음을 반증한다. 

미학을 추구하는 예술인들이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정치와 거리를 두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현실 정치에 목소리를 낸 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불합리하고 정직하지 못한 사회로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카데미와 블랙리스트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상황과 한국의 현실은 맞닿아있다. 26일(현지시간) 저녁 막을 올린 제89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우리로 치자면 광화문 광장이었다. 촛불을 든 이유만 달랐다. 우리 예술인들이 블랙리스트에 목소리를 높였다면, 할리우드 배우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 이민정책을 성토했다.  
"이번 시상식이 가장 정치적일 것"이란 예측들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시상식 진행을 맡은 지미 키멀은 "트럼프 대통령께 감사드린다. 지난해 오스카상이 인종차별적으로 보였지만, 올해는 그게 사라졌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반 이민정책 덕분에(?) 올해 아카데미는 '유색인종 차별' 논란이 없을 것이란 예견이다. 
트럼프 대통령을 앞장서 비판한 명배우 메릴 스트립을 옹호했다. 앞서 트럼프는 메릴 스트립에 대해 "과대평가된 배우"라고 비난한 바 있다. 
이란 감독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은 '세일즈맨'으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지만 이날 시상식은 보이콧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 이민법 행정명령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번 시상식의 가장 큰 이변은 역시 영화 '문라이트'의 작품상 수상이었다. 이 영화는 미국 마이애미를 배경으로 흑인 아이가 청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는 정체성 혼란을 다뤘다. 아카데미가 그 동안 백인 중심의 시상식으로 비판받아왔다는 점을 돌아보면 인종 간 화합의 메시지를 담은 결정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변과 이변없음
미국에 인종 간, 국가 간 갈등을 조장한 트럼프의 반 이민 정책이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문화계 조직과 인사를 차별한 블랙리스트가 있다.  
직간접적으로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느꼈던 예술인들은,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확인한 뒤 혼이 비정상이 됐다. 그림, 음악 등 정부 비판적 창작 활동으로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블랙리스트는 예술계까지 사상 검증해 '말 안 들으면 국물도 없다'도 믿게 만든 치촐함의 '끝판왕'이다. 하지만 이런 불합리함에 맞서는 우리 예술인들의 뒤에는 아카데미도 없고, 먼저 나서주는 메릴 스트립도 많지 않다. 
이들이 아카데미에 참석한 스타들만큼 지명도가 높지 않고, 전국 방송에서 대놓고 정부를 성토할 정도로 방송 환경이 민주적이지도 않아, 목소리를 높여도 한계는 뚜렷하다. 
또 한 가지. 27일은 대한민국에도 중요한 날이었다. 미국의 영화인들이 이변을 일으키는 순간, 대한민국에서는 이변이 일어나지 않았다. 국민의 70%(정세균 국회의장실, 특검 연장에 대한 여론조사)가 특검 연장을 찬성하고 있지만, 황교안 대통령 권한 대행은 연장을 거부했다.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정치에는 둔감해도 맡은 바 최선을 다하면 누구나 조건 없이 잘사는 사회가 아름답다. 그렇지 못하다면 최소한 이변이라도 있어야 한다. 대세에 영향을 줘야, 국민들이 숨을 쉬고 희망을 본다. 미국의 이변을 바라보며 이변 없음에 불행한 건 누구의 몫일까. / kjseven7@osen.co.kr 
[사진] TOPIC/Splash News. ⓒAFPBBNews =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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