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의 클리닝타임] 부담에 짓눌렸던 한국, ‘정신력’의 재구성
OSEN 김태우 기자
발행 2017.03.11 07: 51

한국 스포츠의 역사는 흔히 투지와 투혼으로 대변된다. 신체조건, 전술, 코칭 기법, 심지어 장비까지 열악했던 예전에 우리가 내세울 것은 남들보다 한발자국 더 뛰는 근성일 수밖에 없었다. 올림픽 종목에서 우리가 투기 종목에 상대적으로 강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신력의 승리’는 스포츠 언론계의 오래된 헤드라인이다.
야구대표팀이 제4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참패했다. 한 수 아래로 여겼던 이스라엘에 충격패를 당했고, 한 수 위로 보던 네덜란드에는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대만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이겨 ‘예선 강등’은 면했지만 유종의 미와는 거리가 있었다. 성적은 물론, 안방에서 열린 대회인 만큼 역시 1라운드에서 탈락했던 제3회 대회보다 훨씬 더 큰 후폭풍이 몰아닥쳤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나올 수 있는 모든 사유가 다 터져 나온 주축 선수들의 불참 등 선발 당시부터 논란이 있었고, 그나마 준비 과정도 철저하지 못했다. “1라운드 통과가 과제”라던 김인식 감독의 대회 전 우려는 엄살로 치부한 채, 그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스라엘과 그래도 우리가 전적에서 우위를 보인 대만은 이길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에 사로잡혔다.

선수들과 코칭스태프가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 있어 ‘잘못된 방향’을 잡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 대회를 앞두고 100% 컨디션을 만든 선수는 손에 뽑을 정도였다. 투수들은 제구가 흔들렸고, 타자들은 빠른 공에 따라가지 못했다. 반대로 개개인의 기량이 뛰어난 네덜란드는 물론, 이스라엘 선수들도 최선을 다해 이번 대회를 준비한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그 결과는 경기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처럼 좋지 않은 결과는 비난이 선수들의 ‘정신력’으로 집결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대회 기간 중 몇몇 행동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사실이다. “배가 불렀다”, “나태해졌다”는 비난을 자초한 감은 없지 않다. 그렇다면 정말 선수들이 건성으로 이번 대회에 임했을까. 야구 관계자들은 “성적이 좋지 않아 크게 부각됐을 뿐, 억울한 면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TV로 경기를 지켜봤다는 한 전직 국가대표 선수는 “선수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태극마크는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의 동기부여가 된다. 우리 팀만 해도 다들 열심히 준비를 해서 대표팀에 갔다”고 옹호했다. 한 감독도 “선수들이 컨디션을 다 끌어올리지 못했고, 상대 팀의 기량이 더 뛰어났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다만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꼭 어디가 부러지고도 뛰어야 투혼인가”고 반문했다.
오히려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는 이도 있다. 다른 선수는 “대표팀 선수들이 지나치게 경직돼 보였다. 투수와 타자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런 무거운 분위기를 빨리 떨쳐낼 수 있었다면 이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스라엘과의 첫 경기가 너무 아쉽다”고 분석했다. 지나친 부담감이 더 잘할 수 있었던 선수들을 짓눌렀다는 것이다.
사실 팬들도 이번 대회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았다. 대표 선발 당시에도 결과와는 관계없이 세대교체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그런 여론을 뒤로 하고 ‘지금 잘할 수 있는 선수’로 대표팀을 구성했는데, 성적을 내지 못했으니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친 것이 맞다. 비판 받아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선수들은 ‘성적’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내지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급해지자 힘이 들어가고, 눈은 흐려졌다.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겉으로 드러나는 활발함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했다는 의견은 또 다른 측면에서의 ‘정신력’을 되새기게 한다. 중압감이 있는 상황 속에서도 최상의 기량을 유지하는 것도 엄연한 정신력의 영역이다. 대표팀은 이런 정신력 관리에 완전히 실패했다. 어린 선수들은 물론, 그런 선수들을 끌고 나가야 할 베테랑 선수들도 자기 제어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평가가 많다. 돌이켜보면 1·2회 당시의 선전도 상대적으로 덜했던 부담감을 경기장에서 신바람으로 승화시킨 ‘정신력’의 승리였다. 이는 분명 투지와는 다른 개념이다.
실제 이번 대회 A조에 속한 4개 팀 중 우리만큼 표정이 시종일관 어두웠던 팀도 없다. 이스라엘 선수들은 대회를 앞두고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우리 선수들이 일본에 가 단체로 도쿄 관광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스라엘 선수들은 그런 일련의 움직임들이 부담감을 줄이고 대회에 집중하는 하나의 분위기 조성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네덜란드 선수단에는 우리 시선에서 다소 충격적인 일도 많았다. 공식 훈련 중 야구공으로 축구를 하거나, 심지어 작은 주머니를 놓고 선수들이 일대일 포스트업 농구를 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놀고’ 있었다. 대만 선수들은 파이팅 하나만은 제일이었다. 상황이 어떻든 점수 하나에 덕아웃이 기립했다. 그러나 우리 선수들은 죄인처럼 차분히 경기를 지켜볼 뿐이었다. 대회 시작부터 끝까지 그랬다.
이번 대회의 실패는, 지금 당장은 쓰지만 앞으로 모든 면에서 좋은 약이 될 것이다. 당장 문제점을 분석하는 목소리가 숱하게 터져 나온다. 변화의 초석이 될 가능성이 크다. 대표팀에 임하는 선수들의 마음가짐도 마찬가지다. 예전처럼 ‘이기지 못하면 죽어라’는 살벌한 여론은 이제 많이 사라졌다. 선수들 또한 “꼭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긍정적으로 극복하는 정신력이 필요할지 모른다. 쉽게 간과하고 있는 또 다른 정신력을 되새기는 대회가 될지 주목된다. /skullbo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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