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유진모 취중한담]드디어 서울 광화문 인근에까지 멧돼지가 나타났다. 각종 질병이 한꺼번에 창궐하며 축산가를 괴롭히고 있는 가운데 사람들의 범죄는 갈수록 흉포화 되면서 그 동기가 복잡해지거나 불분명해지고 있다. 조현병이란 정신병이 포털사이트 검색어 상위권에 오를 정도다. 자연재해는 말할 것도 없다. 유례없던 폭우 폭설 쓰나미 등이 난무한다.
최근 국내 극장엔 일본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철학적 SF 걸작 ‘공각기동대’를 실사판으로 리메이크한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이 개봉돼 화제다. 전 세계 인구가 70억 명이라고 한다. 1760년대 영국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퍼진 산업혁명 때만 해도 인류의 팽창과 과학과 산업의 무한한 발전은 이 커다란 지구에 그다지 큰 악영향을 끼치진 못할 것으로 봤지만 그건 착각 혹은 무책임이었다. 지구촌은 확연하게 병들어가고 있으며 이미 인간의 식탐과 취미에 의해 멸종된 동물만도 수두룩하다.
그런 와중에 요즘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디지털첨단기술이 결합한 의학(공학)과 인공지능(A.I.)이다. 신체의 일부 혹은 장기 등을 대체하는 의술과 과학의 발달로 기능이 진화하고 생명이 연장되기를 바라는 욕구가 이미 현실화된 지 오래며, 에이아이로 완벽한 전자동의 스마트라이프가 코앞에 와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이 모든 편의시설 및 장치가 사람의 행복과 지구의 안락에 기여만 할까?
‘공각기동대’는 시로 마사무네가 1989년부터 잡지에 연재한 만화를 원작으로 마모루가 1995년 극장에 개봉한 영화다. 서기 2029년. 수많은 사람들이 사고나 질병 때문에 혹은 일부러 신체의 기능향상을 위해 의체와 전뇌로 몸은 물론 뇌의 일부까지 기계이식 수술을 받고 살아가는 세상이다. 물론 외형상 거의 구분이 불가능한 완벽한 사이보그도 있다. 주인공 쿠사나기는 뇌의 일부만 사람일 뿐 나머진 모두 기계인 사이보그다.
‘그녀’가 네트워크에 침투해 각종 첨단범죄를 저지르는 인형사란 테러범을 잡고 나서 서로 나누는 대화 및 고뇌는 이 영화가 가진 철학이자 인간의 정체성과 이기심에 대한 갈등과 경고다. 정부의 비밀작전에 의해 탄생한 인공지능인 인형사는 그 기능이 워낙 뛰어난 덕에 자아를 갖게 됨으로써 웬만한 인간 이상의 철학을 지니게 되고, 완벽한 생명체 및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갖추기 위해 일부러 쿠사나기를 끌어들였으며, 결국 두 ‘사람’이 결합해 완벽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지닌 소녀(새 인류의 이브)로 거듭난다는 게 결말이다.
이는 과학을 발달시켜 오히려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인류에 대한 훈육이고, 에이아이가 마냥 인류의 하위계층에 머물지 않고 언젠간 자아확립을 위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경고다. 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1968년 당시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아이디어와 기술로 SF의 교과서인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세상에 내놨다. 우주비행선의 컴퓨터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승무원들이 위기에 빠진다는 내용.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의 ‘바이센테니얼 맨’(1999)은 가사로봇 앤드류가 사람의 실수로 신경계에 이상현상이 생겨 지능과 호기심을 갖게 됨으로써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그린다. 마치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진리를 찾아 당나라로 가다가 해골로 물을 마신 뒤 깨달음을 얻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앤드류는 첨단기술로 육체와 결합해 인간처럼 죽음을 맞음으로써 사법부로부터 비로소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영화는 앤드류를 사람보다 더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으로 그린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A.I.’(2001)는 병으로 아들이 뇌사상태에 빠진 가정에 입양된, 최초의 감정을 가진 로봇 소년 데이빗이 주인공이다. 진짜 사람이 되고픈 데이빗이 파랑새를 찾아 기나긴 여정을 거치는 로드무비 형식으로 진행된 영화의 결말은 지구에서의 모든 생명체의 종말과 인류의 멸종이다. 수십만 년 후의 생명체가 전멸한 지구를 지배하는 종은 첨단의 에이아이다.
오는 20일 개봉될 이반 실베스트리니 감독의 ‘모놀리스’는 100% 완벽한 자율주행 및 제어 등이 보장된 인공지능 자동차 안에 갇힌 아들을 구하기 위한 엄마의 사투를 그린다. 인간성보다 기계의 완벽한 제어에 집착함으로써 인간이 오히려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메시지 면에선 앞선 SF영화들과 다를 바 없는 스릴러다.
실사판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은 오리지널과는 좀 다른 내용과 결말이다. 오리지널의 철학은 윤색됐고, 대신 액션과 비주얼이 화려하게 강화됐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첨단과 편리란 이기심에 기대 세상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경종은 일관된다.
이렇듯 다수의 SF영화는 자연보호 다큐멘터리 이상의 환경파괴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오랫동안 많은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엑스맨’ 시리즈의 주인공 울버린을 앞세운 휴 잭맨의 고별작 ‘로건’의 배경은 사막화된 멕시코다. 사람들은 모두 눈에 초점을 잃고 희망이 없어 보인다. 로건과 자비에 교수의 초능력이 사라지고, 더 이상 돌연변이들이 생겨나지 않는 이유는 공해 때문이란 암시가 저변에 깔려있다.
울버린의 뼈는 정부의 생체실험에 의해 아다만티움으로 변경됐다. 이렇게 인류는 다른 생명체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만 사용할 따름이다. 돌연변이를 사람이 아닌 별종으로 보는 것은 인종차별의 은유다. 닐 블롬캠프 감독의 '디스트릭트 9'이 아주 좋은 예다. 일부 SF에선 아주 평범한 인간마저도 파괴하길 서슴지 않는다.
다수의 예상을 깨고 알파고가 이세돌을 압도했을 때 아마 대중의 기계에 대한 두려움은 본격적으로 가시화됐을 것이다. 사람들이 컴퓨터가 뭔지 그 용어조차 생소하던 1968년 큐브릭은 자연스레 우주를 여행하고, 그게 가능한 게 첨단지능을 지닌 컴퓨터 덕으로 그렸다. 그러나 기계가 언제나 인류의 심부름꾼이란 건 착각이라고 이미 그때 경고했다. 기계의 인간말살을 그린 가장 대중적인 영화는 ‘터미네이터’ 시리즈다. 첫 편이 개봉된 1984년 역시 아직 컴퓨터가 대중화되기 이전이었다.
밀라 요보비치를 세계적인 여전사로 각인시킨 ‘레지던트 이블’(2002) 시리즈 역시 마찬가지다. 거대 제약회사 엄브렐러가 사실상 국가를 장악하고, 이곳의 슈퍼컴퓨터 레드퀸이 인간들을 말살한다는 내용이다. 엄브렐러가 만든 비밀무기 좀비바이러스는 빠른 속도로 인류를 멸망의 길로 몰아가고 있었다.
영화는 과학보다는 상상력이 창조에 깊게 개입하는 작업이다. 과학 등의 학문을 기초로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기술의 도움을 받아 영상을 완성한다고 하더라도, 거의 모든 영화가 과학적 근거나 입증에서 벗어난 상상력의 나래를 더 넓게 펼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첨단의 기술을 소재로 하는 SF는 기술이 상용화되거나 심지어 개발도 되기 전에 단지 창조력 하나만으로 미래를 예견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거의 들어맞곤 한다. 그건 영화라는 상업적 대중문화 콘텐츠가 갖는 강점이다. 대중가요가 추억의 기억기간을 연장해주거나 소환하면서 감동과 안식을 주는 기능을 한다면 영화는 예언과 경고메시지의 직능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사람의 몸에는 자연면역체계가 구성돼있고, 그 가장 흔한 사례가 바로 통증이다. 몸에 이상이 올 때 ‘지금은 이 정도밖에 안 아프지만 그대로 방치하거나 긴급처치를 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경고다.
영화가 그리는 환경파괴와 인간성 말살의 설정은 바로 인류의 멸종을 경고하는 통증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인트로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로 추정되는 유인원들을 깨우치고 집단을 이루도록 가르치는 지도자는 돌기둥 모놀리스다. ‘모놀리스’가 영화로 나온 이 시점은 종교 민족 이념 등의 갈등이 최고조로 달했고, 이상기상기후현상이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이다./osenstar@osen.co.kr
<사진> '공각기동대' 스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