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시네마] '불한당' 설경구는 인생연기, 임시완은 감탄연기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7.05.05 07: 57

[OSEN=유진모의 취중한담]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변성현 감독, CJ엔터테인먼트 배급)은 기시감을 많이 준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의 누아르를 기본으로 ‘무간도’ ‘프리즌’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신세계’ 등의 감옥액션, 조폭액션, 언더커버(위장잠입), 그리고 남자들의 진한 의리에 대한 철학이 콸콸 쏟아지는 게 그렇다.
류승완이 타란티노식 액션을 오마주했다면 변성현은 몇 계단 뛰어 한국적 누아르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변별성 높은 연출솜씨를 보여준다. ‘게임의 법칙’(장현수 감독)과 ‘깡패수업’(김상진 감독)에서 꿈틀대 ‘친구’(곽경택 감독)를 기점으로 전성시대를 연 조폭 누아르가 식상해진 지금 ‘불한당’은 뉴 스타일리쉬 누아르의 한국적 형식을 제시한다.
국제무역을 가장한 마약과 무기 밀매 폭력조직인 부산 오세안무역회사 회장 고병철(이경영), 2인자 재호(설경구), 병철의 조카이자 재호의 친구 병갑(김희원), 그들을 잡으려는 경찰 천 팀장(전혜진), 그녀의 말단 팀원 현수(임시완)가 주인공.

천 팀장은 시시각각 현수의 목을 죄어오고, 재호는 점점 더 현수에 대한 의구심이 커진다. 과연 누구와 누가 손을 잡을까? 진정한 불한당은 누구일까? 재호와 현수의 우정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이며,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영화의 주제는 신의와 배신이고, 설파하는 철학은 인생이란 부조리다. 각기 다른 위치의 다섯 주인공은 모두 아군을 믿지 못한다. 재호는 12살 때 집단자살을 시도한 아버지에 의해 죽을 뻔했지만 눈치를 채고 음식물을 토해 생존함으로써 세상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오늘의 자리에 이르는 동안 숱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왔다 배신하고 떠났다. 그는 ‘사람을 믿지 말고 상황을 믿자’는 교훈을 현수에게 전수한다.
그는 죽마고우인 병갑과 자신을 굳건하게 믿고 따르며 대화가 통하는 현수 사이에서 갈등한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그이지만 어느덧 은퇴를 고려하게 된 이젠 자신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진정한 친구 한 명이 절실한 것이다.
현수는 가장 믿었던 천 팀장 혹은 국가 체제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그 감정은 타깃이었던 재호가 자신을 믿고 진정한 우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더욱 커지는 중이다. 전형적인 스톡홀름 신드롬이 그의 내면세계에서 꿈틀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기준과 정체성의 혼란마저 겪게 된다.
그런 현수의 변화를 천 팀장과 동료 형사들이 모를 리 없다. 천 팀장은 이번 언더커버 작전으로 이미 한 중견형사를 잃었다. 만약 현수의 작전마저 실패한다면 그녀는 옷을 벗어야 할 판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경찰공무원으로서의 신념, 선배로서의 동료애, 인간미 등은 한 방울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메말라간다.
병갑은 삼촌의 편에 설까, 둘도 없는 친구인 재호와 손을 잡을까, 고민한다. 평양냉면 사오라는 심부름에 함흥냉면을 사왔다고 두들겨 패는 등 매사에 자신을 무시하고 부하들 앞에서 체면을 망가뜨리는 삼촌에게서 어느덧 마음이 떠난 건 사실이다. 재호는 믿을 만하다. 그런데 재호는 자신보다 현수를 더 아끼는 눈치다. 갈등은 깊어만 간다.
영화는 프랑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을 많이 닮았다. 재호와 현수는 힘들여 정상에 올리면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돌을 끊임없이 올려야 하는 운명의 시시포스이자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다. 현수는 “왜 이렇게 살아?”라고 재호에게 묻고, 재호는 “이렇게 살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살려고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시시포스 혹은 뫼르소를 연상케 하는 답을 내놓는다.
카뮈는 생전에 ‘가장 부조리한 죽음’이라던 교통사고로 숨졌다. 뫼르소의 사연은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돼 살인으로 이어져 결국 법정에서 장례식 때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으며 막을 내린다. 현수 역시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흔들린다. 경찰도 조폭도 아닌 현수도, ‘정통 건달’도 정상적인 사업가도 아닌 재호도, 러시아와의 외교마찰을 우려해 병철 검거를 보류하는 사법행정체제에 반발하는 천 팀장도 모두 이방인이다.
‘이방인’과 ‘불한당’이 또 일치하는 맥락은 부조리다. 카뮈가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던 부조리한 교통사고로 죽었듯 ‘불한당’의 주인공들은 모두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부조리를 스스로 만들어나간다. 실존주의 철학자이기도 한 카뮈는 세상이 부조리의 상황을 만들어냄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질투와 야심으로 인한 방종에 물들어있다고 주장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다.
시시포스의 키워드는 ‘속임수’와 ‘못된 지혜’고, 카뮈는 그를 실존적 부조리의 상징으로 묘사했다. 마치 진정한 맥거핀 장르의 정수를 보여주겠다고 작정한 듯 영화에는 온갖 속임수가 난무한다. 시시포스가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와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속였듯이.
현수는 ‘나와 사회가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부조리한 자’인 재호를 잡기 위해 위장잠입했다. 그러나 천 팀장 등 동료는 현수를 부조리한 자로 동일시하는 눈치다. 재호 역시 현수의 정체성을 의심한다.
시나리오까지 쓴 감독의 연출력은 참으로 놀라운 수준이다. 스토리와 캐릭터 그리고 상황과 분위기를 버무려 이끌어가는 솜씨가 뛰어난 스타일리스트의 탄생이다. 각 인물들의 심리상태를 묘사할 때의 각기 다른 톤과 실루엣 그리고 역광과 순광의 설정은 극의 무게를 더욱 진중하게 몰아간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몽타주기법과 교차편집은 2시간을 시종일관 압박하기에 충분하다.
설경구의 확 달라진 연기패턴에서 그가 이 작품에 거는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박하사탕’과 ‘실미도’ 등 매번 같았던 연기톤은 사라지고 선과 악 사이에서 고민하거나 선과 악을 헷갈려하는 ‘아수라 백작’을 완성했다. 이제 임시완은 ‘아이돌 출신’이란 꼬리표는 더 이상 없을 듯하다. 그게 설경구의 혼신을 다한 열연의 후광 덕인 것은 스크린 구석구석에 묻어있다. 유일한 여주인공 전혜진은 재발견 혹은 뒤늦은 발견이다.
타란티노식 재기발랄한 유머가 군데군데 포진된 점 역시 무거운 전체 분위기와 균형을 맞추는 매끄러운 재미다. 제70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됐고, 프랑스 등 세계 각국이 블록버스터급 수입료를 지불하는 데 앞을 다툰다는 보도에 고개가 끄덕여질 만한 ‘괴물’이 탄생했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5월 18일 개봉. /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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