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시스트 서영도(48)에게선 조각가의 이미지가 떠나질 않는다. 마치 예술작품의 오브제나 값비싼 생활명품처럼, 음반의 결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그리고 혼신을 다해 다뤄왔다. 그에게 2007년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연주/최우수 재즈&크로스오버 음반상(‘Circle’)을 안긴 서영도트리오 때도 그랬고, 2010년 결성해 지금까지 활동중인 7인조 서영도 일렉트릭 앙상블도 그랬다.
지난 24일 발매된 서영도 일렉트릭 앙상블의 정규앨범 ‘가물거리는 세상’은 이런 이미지의 정점에 선 ‘작품’. 대충 BGM으로 듣고 지나치기에는 트랙 하나하나의 완성도와 밀도가 너무 높다. 이 작품을 위해 그가 들었을 끌과 정의 형상과 소리가 환영과 환청처럼 어른거린다. [3시의 인디살롱]에서 서영도를 만나 작품의 속내를 짚어봤다. 부디, 이 인터뷰가 선량한 음악애호가들과 서영도 팬들에게 충실한 가이드가 되기를.
= 4년만에 나온 신작이다. 서영도 일렉트릭 앙상블로는 정규 3집, 서영도 통산으로는 정규 5집이다.
“원래 2013년에 내고 안냈다. 굳이 CD를 내야할까 싶었다. 적자니까, 다들 너무나 많은 음악의 홍수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의무감으로 음반을 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동기부여가 안된 차에 그렇게 몇년이 흘렀다. 그러다 2016년 어지러운 시국을 바라보면서, 그런 나라 안에서 살아가면서, 내가 비록 이승환도 아니고 김제동도 아니지만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연주곡보다는 노래곡으로, 제목도 영어보다는 한글로, 재킷도 컬러보다는 흑백톤으로 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이번 ‘가물거리는 세상’이 나왔다. 이번이 내 다섯번째 앨범인데, 그동안 노래곡 하나 없이 오로지 연주곡들만 했었다.”
= 그러고보니 트랙 모두 한글제목이다.
“곡 제목을 영어로 바꾸면 무척 이상하다. ‘무사고’를 ‘No Accident’, ‘그래도 희망’을 ‘But Hope’로 바꿔보시라. 이상하다. 재킷 이미지도 내가 제주도에 가서 직접 찍은 것이다.”
cf. 서영도 디스코그래피(정규앨범은 통산으로 계산)
= 2006년 8월 서영도트리오 1집 ‘Circle’
= 2008년 8월 서영도 2집 ‘Bridge’
= 2010년 10월 서영도 일렉트릭 앙상블 3집 ‘Random Line’
= 2013년 10월 서영도 일렉트릭 앙상블 4집 ‘New Beginnig’
= 2017년 5월 서영도 일렉트릭 앙상블 5집 ‘가물거리는 세상’
cf. ‘가물거리는 세상’ 크레딧(서영도 일렉트릭 앙상블)
서영도 = 베이스, 프로그래밍, 키보드, 프로듀싱
민경인 = 피아노, 키보드
정수욱 = 기타
한웅원 = 드럼
배선용 = 트럼펫
김지석 = 알토 색소폰
신현필 = 소프라노/테너 색소폰, 혼 어레인지먼트
레코딩 = 김영식, 박재준, 서영도, 정수욱, 신현필, 이효섭
믹싱 = 최성준
마스터링 = 나상욱
커버사진 = 서영도
메이킹 필름 = 류빈영
앨범 디자인 = 김정배
= 왜 하필 5월에 나왔나.
“지난해 12월에 곡을 쓰고, 올 1월에 녹음을 하고, 2월에 믹싱과 마스터링을 다 마쳤다. 2월28일 모든 작업을 끝냈다. 그런데 3월에 도저히 낼 수가 없었다. 워낙 많은 일들(탄핵재판, 대선)이 있었고 있을 예정이었으니까. 그때 냈다가는 페북에 줄 하나 올리면 바로 없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대선 바로 다음날인 10일 선공개곡(‘무사고’)이 나오게 된 것이다. 사실, 지금은 음악도 가물가물하다. 메이킹 필름도 다 겨울옷 입고 찍었고.”
= LP로도 발매됐다.
“이번 음반은 나중에 혹시라도 필요할까봐 아예 처음부터 (고품질 음원 마스터링 수준인) 24비트/96kHz로 녹음했다. 컴퓨터가 터질 정도다(웃음). (LP를 제작한) 마장뮤직앤픽처스 대표랑 친한데 둘이 의기투합해서 이번에 LP를 내게 됐다. 마스터링을 따로 했다. 분량 문제로 인해 CD나 디지털음원 중에서 LP에 빠진 곡이 있다. 어떤 곡은 페이드 아웃을 잘라버려 길이가 다르다. 개인적으로는 LP 자체가 멋져보인다. 피지컬한 게 근사하고, 재킷도 클 뿐더러 소장하는 느낌도 생긴다. 영국 같은 곳은 이미 LP 판매량이 CD 판매량을 앞섰다고 한다.”
cf. ‘가물거리는 세상’ CD 및 디지털음원 트랙리스트
1. 2017 시작 2. 가물거리는 세상(feat. 백현진) 3. 진흙탕 4. 착각(증거2) 5. 무사고(feat. 조정희) 6. 그래도 희망(feat. 나찰, Always There, 박주원) 7. 증거1 8. 변신(feat. 백현진) 9. 어둠(feat. 백현진) 10. 달콤한 인생 11. 난 별(feat. YUL)
cf. ‘가물거리는 세상’ LP 트랙리스트
[Side A] 1. 2017 시작~가물거리는 세상 2. 착각(증거2) 3. 무사고 4. 그래도 희망 [Side B] 1. 증거1 2. 달콤한 인생 3. 변신 4. 난 별
= 올해 계획은.
“5월21일 서울 망원동 벨로주에서 음감회를 했고, 7월에는 (이번 음발 발매기념) 쇼케이스를 할 생각이다. 음반에 참여한 사람들이 워낙 많아 스케줄 맞추려면 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 몇 곡만 같이 들어보자. 코멘터리를 부탁한다. 우선 조정희가 피처링한 선공개곡 ‘무사고’부터. 역시 조정희는 음색 킬러다. 그리고 베이스는 연주가 아니라 노래하는 것 같다.
“가볍게, 미니멀하게 만든 곡이다. 드럼도 없고 기타도 없다. 피아노만 있다. 다 어쿠스틱이다. 밴드 이름이 ‘서영도 일렉트릭 앙상블’이라 사람들이 ‘뭐가 일렉트릭이야?’ 할 것 같다. 보컬은 나윤선보다는 조정희가 더 어울릴 것 같아 쓰게 됐다. 친하니까 무리없이 부탁할 수 있었다.”
= 타이틀곡은 ‘가물거리는 세상’인데, 후반 갈수록 점점 오케스트라 대곡이 되는 점이 인상 깊다.
“CD에서는 ‘2017 시작’과 따로 떨어져 있지만, LP에는 연이어 붙어있다. CD에 붙어있으면 너무 길어 라디오에서 신청을 못한다. 일종의 편법이다(웃음). 이 곡은 (피처링 보컬인) 백현진이 작사했다. 원래 연주곡으로 만든 곡인데, 사람 목소리가 들어가면 더 어울리겠다 싶었다. 백현진과는 방백(방준석 백현진) 세션 시절 함께 한 인연이 있어 부탁을 했는데, 가사까지 써보겠다고 하더라. 결과물에 100% 만족한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쓸쓸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희망을 갖고 살아가자, 이런 내용이다. 드럼을 잘게 쪼갠 것은 행진곡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였다.”
cf. ‘가물거리는 세상’ 가사
새벽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밤 빛 어둠 찰나 우리가 갑자기 받은 무거운 소식 너와 내가 겪는 일들 누군 떠나고 누구는 죽어서 기억이 계속 헛돈다 / 볕이 좋은 날에는 볕을 찾아 앉아서 기억을 멈춰본다 가능한 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도록 순간을 살아본다 / 어둡고 하얗고 노랗고 푸르고 희미한 선명한 가물거리는 세상 / 골목길에서 꽤 오랫동안 부서진 계단에 앉아 며칠 전 오후 산에서 본 꿩 한 마릴 생각한다 / 풀숲으로 사라지는 꿩을 가만 보다가 석양을 맞이한 난 가능한 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도록 순간을 살아본다 / 어둡고 하얗고 노랗고 푸르고 희미한 선명한 가물거리는 세상
= ‘그래도 희망’에는 박주원이 참여했다. 집시 기타리스트로 알려져있지만 원래 밴드에서 무지막지하게 일렉을 구사했던 사람이다.
“맞다. 일렉으로 출발했던 박주원이 기타로 참여했다. 트럼펫은 배선용과 함께 협연자로 조정현 추명호가 가세했다. 랩이 들어가니까 좀더 하드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베이스도 비밥 스타일로 짠 것이고. (랩 피처링한) 나찰과는 실용음악과 강의 때 만나 알게 됐다. 이 곡은 나찰이 다른 동생(Always There)과 주고 받는 대화식으로 구성됐다.
cf. ‘그래도 희망’ 가사
막지 마 내 앞길은 내가 챙겨 갈 길은 정해 놓은 걸 됐어 횃불이 시작된 하나의 작은 불씨 큰 그림 거짓말과 고난 겪어내 보자 자자! 드러나 진실 매몰 현장은 너와 나의 소망 / 계속 이겨내야 해 답은 나아가는 것밖에 내 안 부정적인 것들이 방해 못 하게 내 인생을 누가 책임져 이제 믿음을 줘 넌 난 준비돼있어 / 있어 있어 이 시대의 값어치 실패에 가려진 것 우리들 손안에 잣대를 가졌지 촛불 하나둘셋 다시 일어난다면 그건 실패가 아니지 우리가 가져야 할 건 믿음과 확신이지 / 다시 볼 태양은 하나 믿음과 사랑 전부 다 삐걱거린 세상은 이 시대의 가치야 겁 없지 Never give up 절대 포기하지 마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까 / 타협은 지나가는 것들 거짓들을 우려하는 것뿐 거친 의지는 더욱더 내 앞길에 깃든 무너지는 거품 여전히 여전해 always there right / 어리다고 할 수 없는 나이 상식과 정의라는 것들 무겁고도 중해 나인 숫자에 불과하니 변함없겠지 / 밑줄 친 시간들이 너무 많어 기억할 페이지 역사의 순간 걸었잖어 한순간 풀어진 문제집 무너진 그때 니 이름은 여기서 다시 써 보내란 말이잖어 / 끝까지 두들긴다면 언젠가 열려 모두 꽃피우는 과정 당장은 멀어 보여도 놓여진 상황에 끝까지 열심히 자신을 속이는 일 없이 움직이길 / 주파수는 다름을 인정하지 그 다름은 잘못된 결과 틀린 건 아니었어 그 다음은 우린 계속 가야지 늘 그랬듯이 이제는 확신하니 절대로 안 숨지 / 같이 같이 가자고 그래 맞지 다시 말하고 그 말이 가진 역사고 그날에 우린 하나고 여태 잘해왔어 그대로 가면 돼 내가 받은 모든 믿음 포기 안 해 약속해
= ‘변신’, 이 곡은 예전 찰리 헤이든(베이스)과 펫 매스니(기타)의 ‘Beyond The Missouri Sky’가 떠오른다.
“원래 방백 앨범(2015 ‘너의 손’) 중에 있던 노래다. 멜로디가 좋아 연주곡으로 공동작업을 하게 됐다. 특이한 게, A파트는 백현진, B파트는 내가 작업했다. 마치,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이 ‘A Day In The Life’를 공동작업했듯이. 또한 백현진이 스캣으로 목소리를 넣은 점에도 주목해달라.”
= ‘난 별’이 마지막 곡이다.
“이소라의 곡(2014년 8집)을 리메이크했다. 원곡 자체가 죽여준다. 가사가 너무 좋아 리메이크를 하게 됐다. 오스카 와일드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빠져 있지만 그래도 그 중에는 저 멀리 별들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이 정서를 최대한 살려내고 싶었다. 원곡은 록 필이 강한데 그 위에 일렉트로닉을 넣었고 뮤트 트럼펫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펙터 프로그래밍은 내가 준비했고, 나머지는 너무 가공한 느낌이 안들도록 다 원테이크로 한번에 했다.”
cf. ‘난 별’ 가사
모든 일의 처음에 시작된 정직한 마음을 잃어갈 때 포기했던 일들을 신념으로 날 세울 때 별처럼 저 별처럼 / 삶과 죽음의 답없는 끝없는 질문에 휩싸인 채 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에 빠져 혼자 괴로울 때조차 별처럼 저 별처럼 / 난 별 넌 별 먼 별 빛나는 별 / 살아가며 하는 서로의 말들 그 오해들 속에 좀 참아가며 이해해야 하는 시간들 속에 원하든 원치 않든 나와 다른 많은 사람들 속에 저 별처럼 / 우주의 한 부분으로 살며 믿는 대로 생긴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을 때 오는 빛나는 결과들에 감사하며 별처럼 저 별처럼 난 별 빛나는 별 / 살아가며 하는 서로의 말들 그 오해들 속에 좀 참아가며 이해해야 하는 시간들 속에 원하든 원치 않든 나와 다른 많은 사람들 속에 사는 별처럼 / 나 너 지금 이곳 다시 별처럼 저 별처럼
= 뮤지션한테 직접 설명을 들으니 귀에 쏙쏙 들어온다. 계속 좋은 작품을 들려달라. 수고하셨다.
“수고하셨다.”
/ kimkwmy@naver.com
사진=민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