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보레가 최근 크루즈 디젤 판매를 앞두고 별도의 미디어 시승행사를 갖는 등 공을 들였다. 올초 가솔린 모델이 풀체인지로 이미 출시 됐고, 8개월 뒤 디젤 모델이 나왔는데 그 때마다 미디어 시승행사를 가졌다. 지난 3월의 시승행사는 명분이 있었다. 쉐보레 크루즈가 무려 9년만에 완전히 다른 성격의 차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차체는 커지고 중량은 130kg이나 줄었으며, 복합연비도 리터당 13.5km에 이르러 충분히 자랑할만했다.
쉐보레가 11월 들어 디젤 모델을 출시하면서 다시 시승행사를 연 것은 단순히 ‘디젤 모델’을 알리기 위함은 아니었다. 근래 한국지엠의 철수설이 크게 대두 된 상황에서 “무슨소리냐, 이렇게 엄연히 살아 있고 잘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철수하지 않는다”고 목소리만 높이는 것 보다는 신차도 내놓고, 차를 팔기 위해 프로모션도 강하게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여주는 게 더 효과적이기는 할 터.
시승 행사장에는 절실함이 가득했다.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한국지엠 임원들은 내용을 가리지 않고 꽤나 허심탄회하게 대답했다.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게 대답의 요지였다.
크루즈 디젤은 한국지엠이 처한 사정 때문에 더 눈길이 가는 모델이었다. 제품력이야 정책에 따라 갑자기 달라질 수는 없는 일이지만 가격은 유동성이 큰 ‘정책’이기 때문이다. 크루즈 가솔린 모델의 부진이 상대적으로 높게 책정 된 가격 때문이라는 지적이 이미 강하게 제기 된 상황이라 디젤 모델의 가격은 민감한 변수였다.
한국지엠은 전략적(?)으로 미디어 시승행사를 할 즈음에는 가격을 공개하지 않았다. 며칠 뒤에 있을 사전예약 때 공개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가격대는 더 궁금해졌고, 기자들 사이에는 깜짝 놀랄 수준의 공격적인 가격 책정을 해 놓고 기대치를 높이고 있다는 말도 오갔다.
그러나 이 같은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졌다. 며칠 뒤 크루즈 디젤 가격이 공개 됐는데, ‘파격적’이거나 ‘공격적’인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소비자들이 생각하는 경쟁모델인 현대차 아반떼 디젤보다는 400만 원 이상 높았고, 3월 출시 된 크루즈 가솔린 모델 대비해서는 최대 500만 원 이상이 비쌌다.
가격을 모른 상태에서 시승할 때 받은 느낌이 급속히 퇴색 되고 있었다.
크루즈 디젤은 1.6리터 CDTi 엔진에 3세대 6단 자동변속기를 달고 나왔다. GM 에코텍(ECOTEC) 엔진 라인업의 최신 모델로, 유럽에 있는 GM 디젤 프로덕트 센터가 개발을 주도한 이 엔진은 최고출력 134마력, 최대토크 32.6kg.m을 낸다. 같은 1.6리터 엔진을 달고 있는 아반떼 디젤이 136마력에 최대토크가 26.5~30.6kg.m인 것과 비교하면 퍼포먼스 면에서 크게 다를 건 없다. 다만 이 엔진은 견고하고 가벼운 알루미늄으로 제작 됐고 내구성과 정숙성이 좋아 유럽에서 ‘Whisper Diesel(속삭이는 디젤)’로 불린다. 차체는 경쟁모델 대비 100mm 이상 긴 4,664mm이지만 중량은 아반떼와 비슷하다. 크루즈 종전 모델과 비하면 차체 강성은 27%가 향상 되고 중량은 110kg이 줄었다.
시승에서 크루즈 디젤은 상당한 수준의 안정감과 높은 연비를 보였다. 고속 구간에서 조용하면서도 힘차게 뻗어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연비는 공인연비인 16.0km/l의 범주를 정확히 지켰다. 고속 구간과 차가 밀리는 도심 구간, 와인딩이 엄청난 교외의 고갯길을 까지 약 45km를 달리고 얻은 연비였다.
그런데 최대토크 32.6kg.m(2,000~2,250rpm)은 고갯길에서는 인상적인 등판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경사가 가파르기는 했지만 언덕길을 속시원하게 주파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답답함이 따를만 했다. 고연비를 위한 세팅이 작용한 듯하다. 최대토크가 발효되는 시점이 2000rpm인 것을 보면, 디젤 엔진이지만 정숙한 주행능력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쉐보레는 11월 한달간 ‘올 뉴 크루즈’ 가솔린 모델을 구매하는 2,000명에게 최대 250만 원을 할인하는 프로모션을 펼치고 있다. 판매 부진에 따른 궁여지책이기는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정가를 내고 구매한 이들을 한순간에 ‘호갱’으로 만들어 버리는 프로모션이다. 할인폭이 커지고, 할인행사 횟수가 잦아지면 ‘정가’는 더 이상 ‘정가’가 아니다. ‘좀더 기다리면 할인가에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하는 것도 판매자에게 좋은 일은 아니다.
이동통신 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이하 단통법)이 있다. 보조금이라는 단말기 지원금이 대리점에 따라, 시기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제 값을 주고 산 이들만 손해를 보는 불투명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다. 단통법이 결과적으로 통신사 배만 불렸다는 비판이 있기는 하지만 처음 이 법이 나온 취지에는 타당한 명분이 있었다.
지금 쉐보레 크루즈를 둘러싼 가격 정책에는 선한 취지의 ‘단통법’이 필요해 보인다. /100c@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