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와 나'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가장 쉽게 떠오르는 작품은 그 옛날 여학생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던 일본 만화일 것이다. 심지어 영화 '아기와 나'는 일본 만화의 분위기와는 대척점에 서 있다. 여러모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던 제목 선택이었을 터.
손태겸 감독은 "고민이 상당히 많았다. 그 만화가 대명사 같은 느낌이 됐더라. 물론 저도 그 만화를 너무 좋아해서 여러 번 봤다. 많은 분들이 우리 영화 제목을 처음 들으시면, '유머러스한 지점이 있나?'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내용이다"라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카운터 펀치를 날릴 만큼 색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뒷통수를 때리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아기와 나'는 결혼을 앞두고 아기만 남겨둔 채 사라진 여자친구를 쫓는 과정을 통해 갓 세상을 향해 한 발을 내딛는 젊은이의 두려움을 가감 없이 표현한 작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청춘을 조명하는 작품인 만큼, 2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 내내 거칠고 무거운 이야기가 계속된다. 불안과 혼란 속에 방황하는 한 남자의 궤적을 집요하게 쫓아가는 '아기와 나'는 '보통의' 사람들이 '일반적'이라고 믿는 삶이, 사실은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득력있게 묘사한다. 영화를 보고나면 포스터 속, '아기와 나'라는 제목 앞에 붙은 '세상 밖에 남겨진'이라는 수식어가 남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다.
"항상 많은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산다고 하면 학교 가고, 회사 가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하고 이런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보통의 것'들을 하기 위해선 너무나도 장애물이 많아요. 비단 영화 속 도일 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도 너무나도 그렇죠. 사실 남들 다 하는 조그만 일 하나 하는 것도 힘든 사람이 정말 많다고 생각해요. 보통 사람들이 잘 산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정말 보통인 걸까, 생각하게 되죠. 도일은 정신을 살짝 차리려고 하면서, 세상 굴레 속에서 살아가려고 의지를 배우는 중이에요. 그러다 한 순간에 테두리 바깥 쪽으로 밀려나는 느낌인 거죠."
'아기와 나'에 100신이 있다면 99신에는 반드시 나올 정도로 원톱 역할을 톡톡히 해낸 이이경은 가장 지질하면서도 불안한 청춘의 얼굴을 우직하게 그려낸다. 이이경의 존재감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손태겸 감독 역시 "촬영하기 전부터 리딩을 할 때나 연습 과정부터 굉장히 몰입을 했다. 모든 부분들이 좋았지만 롱테이크로 촬영하면서 이이경의 진가를 더욱 느꼈다"며 "마지막 부분 정도에 이이경 씨가 교회에 달려가서 소동을 벌이는 장면이 있는데 롱테이크로 촬영했다. 결코 쉽지 않은 촬영이었는데 이이경 씨가 그걸 완벽하게 해냈다. 롱테이크를 이끌어갈 수 있는 연기자의 힘이 없다면 힘든 신이었을 텐데 이이경 씨가 해내는 걸 보면서 내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또 한 번 확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기와 나'는 불안한 청춘이 쉽지 않은 선택을 통해 어떻게 천천히 성장해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누군가 보기에 문제아, 반항아로 손가락질 받을 수 있지만, 도일 역시 '보통의 삶'을 꿈꾸는 가장 보통의 청춘이다. 이러한 도일의 성장 동력이 되는 것은 다름아닌 '아기'다.
"성장통이나, 청춘의 아픔, 정말 많은 소재가 있을 수 있지만 제가 이 영화의 바탕이 된 실화를 듣고 생각한 것은 대단히 큰 시련을 가진 주인공이었거든요. 왜 이 아이를 짊어지게 됐을까, 남의 아이를 책임지게 된 이 마음은 대체 어디에서 오게 됐을까. 속된 말로 다시 새출발을 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상황을 만들 수도 있었을텐데, 어머니가 없는 상황에서도 그런 결정을 내린 마음은 뭘까, 제게는 계속 물음표였어요. 대체 아기라는 존재와 생명이 뭐길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런 선택을 내리는 걸까, 이런 의문 속에 남자는 찾아야 하고, 여자는 도망가야 하고, 투박하고 거친 환경에서 놓여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손태겸 감독은 첫 장편 데뷔작 '아기와 나'를 통해 섬세한 연출력을 또 한 번 인정받으며, 차기작에 대한 기대 역시 높였다. "2019년에는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손태겸 감독의 목표라고.
"2019년에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제가 계속 얘기하고 다녀요(웃음). 내공은 없는데, 완벽주의도 아니면서 게으른 편이거든요. 어떤 관객 분이 '소처럼 시나리오를 쓰세요'라고 하던데 그래야겠어요. 2019년에 신작을 선보이겠다고 공언을 했더니 셀프 채찍질이 되더라고요. 현재는 구상단계고,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요. '아기와 나'는 너무 여과없이 보여드린 느낌도 들어요. 의도에 대해서는 부끄러움이 없지만, '아기와 나'를 통해 똑똑한 방법이 있다는 것도 배웠어요. 혼나면서 배우는 느낌이랄까(웃음). 관객 분들은 무슨 '숙제검사야'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다음 작품을 했을 땐 더 나아지겠죠?" /mari@osen.co.kr
[사진] KAFA/CGV 아트하우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