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SK는 마이너리그에서 매력적인 공을 던지는 한 투수를 발견했다. 시원시원하게 공을 던지지만, 또 변화구도 효율적으로 던질 줄 아는 투수였다. 여기에 나이도 어렸다. 가능성이 무궁무진했다. 이견 없이 체크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선수와도 직접 접촉했다.
불행하게도 인연은 곧바로 이어지지 못했다. 2015년 후반기 팔꿈치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선수를 다시 지켜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SK 관계자들은 허탈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성품에 끌렸다. 선수가 직접 관중석으로 올라와 SK 관계자들에게 “수술을 받는다”고 미안함을 드러냈다. 부상을 숨기고 계약하는 선수들도 있는데 솔직했다. 한 관계자는 "그때 정말 괜찮은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떠올렸다.
그렇게 영입은 물 건너갔지만 SK는 꾸준히 이 선수의 동향을 체크했다. 그리고 올해 다시 만났다. 나중에 선수를 통해 안 사실이지만 SK도 모르게, 다른 팀들도 이 선수를 눈여겨봤다. 지방의 한 구단, 수도권의 한 구단도 유력 후보자로 올려놨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선수의 결정은 SK였다. 사실 장기 부상이 있었던 터라 에이전트에게도 뒷전으로 밀려난 힘겨운 시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항상 꾸준히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 SK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SK와 앙헬 산체스(28)는 이렇게 2년의 시차를 두고 결국 인연을 맺었다.
'하퍼도 삼진' 산체스, 힘의 야구 지켜보라
SK는 올해 뛰었던 스캇 다이아몬드와의 계약을 포기했다. 나름 준수한 성적을 낸 터라 위험부담이 있었다. 그러나 산체스라는 확실한 대안에 오히려 가슴이 뛰었다. 수술을 받고 복귀한 산체스는 피츠버그 유니폼을 입고 드디어 메이저리그(MLB) 무대를 밟았다. 불펜이기는 했지만 평균 96마일(155㎞)의 강속구를 던졌다. “구속은 더 올라오고 더 성장할 것”이라는 SK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40인에 묶였지만, 이적료 지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연봉 총액 110만 달러(이적료 별도)에 계약한 산체스는 전형적인 우완 파이어볼러 유형이다. 통계전문사이트 ‘팬그래프’의 집계에 따르면 올해 구사비율이 48.1%였던 포심 평균 구속은 96마일에 이르렀다. 여기에 슬라이더성 움직임을 가진 커터(21.2%·평균 147㎞), 좌타자 상대로 쓰는 체인지업(13.9%·평균 145㎞), 존에서 뚝 떨어지는 움직임을 가진 파워커브(15.4%·평균 132㎞)를 고루 구사한다. 선발로 나서면 구속이 떨어지겠지만, KBO 리그 기준으로는 특급이다.
강력한 빠른 공은 MLB의 대표적인 타자들도 치지 못할 만큼 위력이 있다. 릴리스포인트가 높지는 않지만 익스텐션(투구시 끌고 나오는 범위)이 길어 체감속도가 빠르다. 실제 산체스의 올해 익스텐션은 6.55피트(약 2m)로 MLB 평균(188㎝)보다 훨씬 길었다. 올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워싱턴전은 이런 산체스의 위력을 잘 살필 수 있는 경기였다.
3회 무사 만루에서 팀의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한 산체스는 트레아 터너를 2루 땅볼로 유도했다. 97마일(156㎞)짜리 한가운데 포심이었는데 터너의 방망이가 완전히 밀렸다. 무사 만루를 무실점으로 정리했다. 4회에는 MLB의 슈퍼스타인 브라이스 하퍼를 3구 헛스윙 삼진으로 잡기도 했다. 초구에 포심을 넣고, 이후 2구와 3구 연거푸 커브를 던져 연속 헛스윙을 이끌어냈다. 앤서니 랜던 타석 때는 바깥쪽으로 제구가 잘 된 99마일(159㎞) 포심으로 카운트를 잡더니 결국 커브로 헛스윙 삼진을 유도했다.
물론 로케이션이나 커맨드가 아주 좋은 선수는 아니다. 만약 이것까지 좋았다면 한국에 올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볼넷 비율이 적은 것은 아무래도 존을 보고 포심을 윽박지르는 성향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공이 날리는 스타일은 아니다. 익스텐션이 길지만 하체가 투구폼을 잘 잡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도미니카 출신 선수치고는 투구폼이 굉장히 안정적인 편이다. 때문에 포심이 낮게 제구되고, 낮은 포심에 방망이가 밀리면 바로 땅볼이 나온다.
주목받는 구종은 하퍼와 렌던을 모두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낸 커브, 특히 슬라이더성 움직임을 가진 커터다. 산체스는 스스로 “커터와 투심을 던진다”라고 하는데, 보통 살짝 꺾이는 다른 투수의 커터와는 달리 산체스의 커터는 상대적으로 크게 휜다. 때문에 현지 중계진에서는 이를 ‘슬라이더’로 구분하기도 할 정도다. 145㎞의 빠른 구속에 대단한 움직임까지 가진 슬라이더성 커터가 좌타자 몸쪽에 바짝 붙을 수 있다면 말 그대로 공포다. 우타자들도 헛방망이를 낼 가능성이 높다.
돈만큼 중요한 '사람의 힘'
동료 메릴 켈리와 마찬가지로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나이인데다, 성품까지 좋다. 보통 구단들은 ‘도미니칸 리스크’를 경계한다. 아무래도 미국 선수들에 비해 흥이 많은데 이것이 나쁜 쪽으로 흐르면 문란한 사생활로 이어지기도 했다. 알게 모르게 사건사고가 많아 외국인 담당자들이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하지만 산체스는 그런 리스크가 별로 없다. 이미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SK 관계자는 “와이프가 멕시코계 미국인으로 어리기는 한데, 굉장히 차분하고 똑똑하다. 산체스가 영어를 잘하는 것도 이 이유다. 조언도 많이 한다. 산체스에게 ‘절대 한국 문화에서는 남 탓을 하지 말라’고 강하게 주문할 정도”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등산을 좋아해 휴일에는 산체스를 데리고 산에 가기도 한다. 하체 보강 때문이란다. 산체스는 이런 현명한 부인과 함께 한국에 체류할 예정이다. SK는 영입 과정에서 이런 부분까지 철저히 체크한 것으로 알려졌다. 숫자에서 읽을 수 없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관건은 좌타자 상대 체인지업, 그리고 급격하게 불어날 이닝을 버틸 수 있느냐다. 하지만 산체스는 한국의 공인구에 흡족해 한 것으로 알려졌다. 손에 잘 맞는다는 만족감이다. 팔꿈치 수술을 한 뒤 2년이 지났고, 원래 선발인 만큼 이닝은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염경엽 단장은 “이제 180이닝, 그리고 200이닝을 차례로 달릴 준비가 된 선수”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SK는 산체스를 내년만 보고 영입한 것이 아니다. 켈리처럼 롱런의 기틀을 닦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이처럼 적잖은 투자를 했지만, 2년을 돌고 돈 산체스 영입전은 돈보다 '의리'로 묶인 사람의 힘이 컸다. 결국 그 돈을 쓰는 것은 사람이고 계약서에 사인을 받는 것도 사람이다. 컴퓨터나 숫자가 읽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도 사람이다. 외국인 선수 영입에 있어 스카우트들의 비중이 큰 이유다. 상황을 정확히 꿰뚫는 능력도 있어야겠지만, 사람을 알고 사람으로 다가가는 능력도 중요하다. 경험도 있어야 하고, 에이전트 사이에서의 네트워크도 있어야 한다. 시간에 대한 인내는 필수다.
그러나 KBO 리그 구단들은 대개 이런 측면에 소홀하다. 성과가 조금 좋지 않으면 곧바로 담당자가 바뀌는 일도 가끔 있다. 쏟아지는 비난을 오롯이 담당자에게 돌리는 폐해가 만연하다. 외국인 선수 담당자들의 수명이 짧은 이유다. 자연히 그간 쌓았던 네트워크와 노하우가 이어지지 못한다. 그러면 또 실패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SK도 마찬가지다. 만약 당시의 담당자와 지금의 담당자가 바뀌었다면, 산체스의 마음을 사로잡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SK도 한때 그런 시절이 있었다. 외국인 총괄과 담당자가 자주 바뀌었다. 이는 타 부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지적, 구단을 이루는 '사람'에 대한 투자에 인색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다행히 최근에는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류준열 사장, 염경엽 단장 모두 "각 파트에서 최고의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 "각 파트에서 최고로 인정받고 다른 팀의 스카우트 구애를 받아야 한다"는 지론이 확실하다. 프런트와 코치 모두 마찬가지다.
물론 그 과정에서 속 터지는 일도 있을 것이다. 전문가를 키워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SK가 부르짖는 '명문구단'으로 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KBO의 잘 나가는 구단들을 살펴보면, 대개 이런 이념이 확고하게 자리할 때 좋은 성적들을 냈다. 이것에 금이 가면 성적이 추락하기도 했다. 이처럼 산체스의 영입 과정은, 단순히 현장뿐만 아니라 프런트 조직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구단의 가장 큰 자산은 빅보드도, 마케팅 이미지도 아닌 사람의 전문성이다. /SK 담당기자 skullboy@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