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은 딘라면, 상처에는 후디딘"
데뷔한 지 20년이 훌쩍 지나서야 유행어 아닌 유행어도 생겼다. 길가다가 아는 사람도 많아졌다. 인생작에 인생캐릭터를 만난 덕분.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문래동 카이스트 역을 맡아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던 배우 박호산의 이야기다.
연극, 뮤지컬, 영화쪽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SBS '원티드', '피고인'에 이어 3번째 드라마 출연으로 대박을 냈다. 흰머리에 혀 짧은 발음으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박호산이다. 주인공보다 더 돋보인 신스틸러란 이런 것.
그런 그가 종영을 3회 남기고 지난 10일 방송된 13회에서 갑작스럽게 이감되며 극에서 하차했다. 시청자들은 "문래동 도다와"를 외치며 짙은 그리움을 내비치고 있다. 워낙 매력적인 감초 캐릭터였기에.
지난 11일 합정동 OSEN 사옥에서 박호산을 만났다. "아직 혀가 덜 풀렸는데 하차해 아쉽다"는 그는 극중 캐릭터 못지않은 입담을 풀어내며 1시간 넘도록 유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간간이 혀 짧은 소리로 들리는 건 보너스 즐거움이었다.
◆"문래동 카이스트도 나쁜놈이에요"
-갑작스러운 하차, 아쉽지 않았나요
"만들어 놓은 짧은 혀도 다 안 풀렸는데 아쉽죠. 대본 나오던 날 하차하는 걸 알았어요. 고박사(정민성 분)는 나갈 때 펑펑 울었다는데 전 마지막 연기가 눈물신이라 겸사겸사 울었죠(웃음). 하차 때문만은 아니라 아내(김선영 분)가 '인간아 그러게 잘 살지' 하는 대사가 와닿더라고요."
-문래동 카이스트도 범죄자이니까요
"'감빵생활'은 매우 현실적인 드라마예요. 시청자들이 캐릭터에 빠져들 때쯤 그도 범죄자라는 걸 인지시켜주죠. 인간적인 부분만 보여주면 미화되는데 아들한테 간 하나 빼줬다고 아빠로서의 부분이 부각되면 안 되죠. 문래동 카이스트도 분명히 죄인인걸요. 범죄자 미화는 신원호 PD나 배우들이 엄청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이랍니다."
-그럼에도 하차 반대 댓글도 엄청나요
"어휴, 감사하죠. 문래동 카이스트의 드라마를 따로 만들어달라는 댓글도 봤는데 만족스럽네요(웃음). 제 분량과 역할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냈으니 슬프지만 섭섭하진 않아요. 제겐 은인 같은 작품이 '슬기로운 감빵생활'이니까요. 연기 경력은 20년이 넘지만 드라마는 3편째에요. 하찮을 수 있는 무대 경력을 인정해주시고 믿어주셔서 열심히했죠."
-인기도 실감하죠?
"길에 다니면 많이 알아봐주세요. 하지만 속지않으려고요(웃음). 다른 드라마에서 좋은 역할 연기를 보여드리지 않으면 또 금방 잊혀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지금은 좋아요. 사인 요청도 즐겁고요. 그냥 옆집 사는 사람 정도로 느끼면서 다가와주시면 사인, 사진 다 해드릴게요."
◆"문래동 카이스트, 혀 짧은 연기 비결요?
-문래동 카이스트는 어떻게 따냈나요
"원래 캐스팅 디렉터가 프로필을 추려서 감독에게 주는데 신원호 PD는 전혀 안 그래요. 본인이 본 인상 깊었던 작품 속에서 배우들을 찾아내죠. 제가 제일 마지막에 캐스팅 됐는데 한 4~5번 미팅을 했어요. 나과장, 교도소장, 장기수, 성동일 형님이 연기한 조주임, 고박사 역할 다 리딩해봤죠. '이래놓고 나 안 시키면 양아치다'라고 했더니 빵 터지더라고요(웃음). 다들 이미지가 딱딱 떨어져서 캐릭터 가져갔다는데 전 다 잘 어울려서 망설여졌대요. 그래서 남은 거라도 달라고 잘할 수 있다고 했더니 제일 좋은 문래동 카이스트를 받았네요."
-흰 머리도 설정인가요
"문래동 카이스트가 극중 51살이에요. 제 머리가 원래 흰 머리라고 했더니 신원호 PD가 놀라더라고요. 흰 머리 캐릭터로 나가면 배우로서 이후 역할에 갇힐까 봐 시작 전에 겁이 난 게 사실이죠. 하지만 염색해서 잘릴 바엔 흰 머리로 갇히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하겠다고 했어요. 다른 캐릭터에 맞게 또 염색하면 되죠 하하."
-혀 짧은 연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요
"고민도 많았고 불만도 걱정도 있었어요. 더듬는 캐릭터, 느린 캐릭터면 괜찮은데 혀가 짧으면 대사 전달이 안 되니까요. 우리나라에선 영구가 유일한 캐릭터잖아요. 그런데 문래동 카이스트가 있어야 PPL 멘트가 가능하고 욕을 자유자재로 풀어낼 수가 있어요. 매력적인 캐릭터더라고요. 살려보려고 신원호 PD를 두어 번 만났어요. 너무 과하면 대사 전달이 안 되고 약하면 광고랑 욕이 노출되니 중간 지점을 찾았죠. 혀 끝을 아랫니에 두고 앞니를 넘어가지 않게 말하면 규칙이 생겨요. 꿀팁 따라해 보세요(웃음). 저 실제로는 혀 짧은 게 아니니까 꼭 기억해주세요."
-라면 광고 들어오는 그날까지!
"옛날에 카레라이스면 광고를 한 번 찍었어요. 지금 보면 정말 웃겨요. 광고 제의 들어오면 좋죠. 라면은 역시 딘라면!"
-촬영장 분위기는 어땠나요
"촬영 내내 재밌었어요. 전라남도 장흥에서 주로 촬영했는데 모여 있으니 친해질 수밖에 없죠. 우리끼리 힘들고 고생해야 행복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딱 그랬어요. 신원호 PD는 컷을 안 해요. 배우들이 쭉 길게 멘트 치도록 지켜보죠. 연기하는 입장에선 뭐라도 해야하니까, 머리끄댕이 잡혔을 때도 팽부장(정웅인 분) 얘기하는 건 애드리브였어요 하하. 완벽하게 회의된 대본, 빅피처를 그리는 팀, 좋은 완결로 가는 어벤저스 팀에 저는 밥숟가락 하나 얹었을 뿐이에요. 고맙습니다." (인터뷰②에서 계속) /comet568@osen.co.kr
[사진] 최규한 기자 dreamer@osen.co.kr, tv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