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난 먼 길이다. 김재영(39) 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심판이 선수로서 못 이룬 메이저리그의 꿈을 심판으로 이루기 위해 지난 4월 1일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주 낯설지 않은 그러나 신세계를 향한 긴 여행이다.
김 심판은 중앙고를 졸업한 1998년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 루키 팀에 입단은 했으나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1년 만에 그만두었다. 190cm의 큰 키에 좋은 체격을 갖춘 우완투수였던 그는 프로야구 선수로 입신을 하지 못한 아쉬움을 프로 심판으로 풀기 위해 그 동안 남모를 노력과 정성을 기울였다. 명지전문대를 졸업한 뒤 한국심판학교를 수료하고 대한야구소프트볼 협회 심판으로 6년간 일했다.
2016년 첫 도전에서 실패했던 김재영 심판은 재수 끝에 지난 2월 미국 플로리다주 베로비치에 있는 마이너리그 심판학교(마이너리그 엄파이어 트레이닝 아카데미)에 합격했다. 한국야구 심판 출신으로 마이너리그 심판학교 시험을 통과한 것은 그가 처음이다. 그는 앞으로 뉴욕 펜(PEN=펜실베니아)리그에 배정돼 본격적인 심판활동을 하게 된다.
뉴욕 펜리그는 싱글A 쇼트(Short)시즌에 속한 하위리그로 루키보다 한 단계 위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 프로야구는 메이저리그 아래로 마이너리그는 트리플A, 더블A, 싱글A, 루키리그로 구성돼 있고, 그 가운데 싱글A는 쇼트, 풀(Full), 하이(High) 시즌 등 3갈래 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김재영 심판이 배정 받은 쇼트 시즌은 싱글A에서도 가장 낮은 단계의 리그인 셈이다. 이 리그에서는 주로 프로 구단에 드래프트된 젊은 선수들이 모여서 경기를 하는 무대이다. 김 심판의 설명에 따르면 쇼트 시즌은 6월 중순에 개막돼 9월 초까지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70게임 정도를 소화한다.
김 심판은 그에 따라 리그가 개막되기 전에 우선 플로리다주 클리어워터에서 열리는 스프링트레이닝 지에서 심판 훈련을 계속한 다음 실전에 배치된다. ‘정처(定處) 없는 발길’이다.
고생스럽기 짝이 없을 이 행군에 나서게 된 김 심판은 “약간 두렵기도 하고, 좀 설레기도 하는 마음이 반반이다.”고 말했다.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려는 의지가 듬뿍 실린 어조로 아주 차분하게 여정을 설명한 그가 대한야구소프트볼 협회 심판을 계속했다면, 아마도 기복 없는 평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안주하지 않고 구태여 모험과 도전을 택했다.
그가 미국 야구심판의 길을 택하기까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 젊은 나이에 가도 그럴 텐데 마흔이 내일모레인 나이에 새로운 길을 개척기하기까지 마음을 굳히기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프로에 대한 갈증을 지울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나이 때문에 프로심판이 못돼 잠시 프로에 대한 미련을 버렸는데…. 해외로 눈을 돌려 남들이 안 하는 메이저리그 심판에 도전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김 심판은 “보스턴의 아픈 기억, 그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 그 때의 좌절이 오히려 의욕을 북돋우는데 힘이 돼줬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련한 옛 추억으로 남은 아픈 기억을 이젠 웃으면서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마이너리그 심판학교에서 어학 실력을 인정받고 어려운 과정을 거친 것을 스스로도 대견스럽게 생각한다. 미국 프로야구 심판 양성학교는 베로비치 다저타운과 해리 웬들스태트(Harry Wendlestadt) 두 곳이 있고 모두 플로리다주에 있다. 미국 프로야구 심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학교를 거쳐야 한다.
김 심판은 “열아홉, 스무 살밖에 안 된 나이 어린 사람들도 많다. 이번에는 베로비치 다저타운에 100명, 해리 웬들스태트에 140명이 지원, 그 가운데 각 스쿨마다 30명씩 관문을 통과했다.”면서 “프로심판의 꿈을 안고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발탁과정은 아주 체계적이다. 날마다 이론과 실기를 병행해서 수업을 받는데 수시로 시험을 본다. 첫 4주 동안에는 문답식으로 상황 설명을 하고 답을 요구하지만 1차 시험을 통과한 뒤 나중에는 상황에 따라 ‘어떻게 룰 적용을 해야 하는가’ 등의 주관식 서술형이다. 심판아카데미 일과는 아주 빡빡하다. 4주 동안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아침 8시부터 낮 12시까지 이론교육을 받고, 오후 1시부터 해떨어질 무렵인 5, 6시까지 야구장에 나가 실기를 배운다. 숙소로 돌아가서도 저녁 식사 후 숙제를 풀고 매일 아침 룰 강의 전에 실시하는 룰 테스트에 대비한 공부도 해야 한다.
김 심판은 “그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아무튼 무탈하게 통과했다. 2016년 1월에 처음 도전했지만 실패했고, 1년을 쉬었다가 올해 1월에 다시 도전했다. 귀가 많이 열렸고, 말하는 것도 첫해보다 잘 돼 그쪽에서도 그 점을 높이 평가한 듯하다”고 설명했다.
그가 마이너리그 심판학교로 가게 된 것은 계기가 있었다.
“2015년에 엄파이어 스쿨을 알아보고 있을 때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히라바야시 다케시 일본심판위원장을 만나게 됐다. 그는 NPB에서 심판활동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트리플에이 심판까지 경험했던 사람이다. 그분한테 충고와 조언을 듣고 마음을 굳혔다. 안정적인 것도 좋지만 하고 싶은 게 프로야구 심판이어서 남들 안 가는 길을 가보자고 다짐하게 된 것이다.”
김 심판의 월 급여는 2000달러이다. 그나마 심판 활동을 하는 4개월 치만 받는다. 마이너리그 상위 리그에 올라갈 때까지 박봉에 시달려야 할 판이다. 그는 “금전적인 부분에서 많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시즌 뒤에는 급여가 아예 없어 외적인 일을 찾아서 해야 된다. 열심히 발로 뛰어다녀야 한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메이저리그 심판은 선수와 마찬가지로 아주 좁은 문이다. 마이너리그 심판이 메이저리그로 오르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과정을 거쳐야 하고 8~10년은 걸린다.
마이너리그 심판은 매 단계마다 엄격한 평가를 받는다. 모든 심판들은 심판평가기구에 소속돼 있는 마이너리그 평가자들이 야구장을 돌아다니면서 평점을 매긴다. 싱글에이는 평가자들이 2~4게임을 직접 보고 평가서를 낸다. 상위레벨은 6~12게임을 보고 평가한다. 마이너리그라도 티브이 중계를 하므로 심판들만 들어가서 볼 수 있는 사이트에 들어가 로스터 등록을 해놓고 평가를 보고 피드백을 받는다.
“굉장히 체계적이다. 그런 시스템이 너무 부러웠다. 아무래도 인프라가 저희보다 넓다보니까.”
김 심판은 “이 악물고 도전하겠다. 마냥 기약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야구선수로서가 아니라 심판이기 때문에 저만 정신을 잘 차리면 되지 않을까.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고 희망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김종우(66) 전 동국대 감독이고 어머니 최숙자 씨는 배구선수 출신이다. 대구상고를 나온 김종우 전 감독은 명포수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다.
식구들을 떠나 이제 완전한 독립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미국에서 장기체류를 하는 것이 약간 두렵기도 하고 좀 설레기도 하고, 반반이다. 식구가 있으면 곤란하겠지만 아직 미혼이어서 혼자 생활하는 것이니까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 심판에 따르면 예전에 마이너리그에는 한국인 심판이 남녀 각 한명씩 활동한 적이 있다. 국선경이라는 캐나다 거주 교포 여성이 2000년대 초반에 잠깐 심판을 봤지만 현재는 김재영 심판이 유일하다.
“어떻게 보면 후배들한테도 길을 열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선수뿐만 아니라 심판으로서도 메이저리그 도전은 어렵겠지만 반드시 해내겠다는 각오로 간다.”
김재영 심판은 결코 쉽지 않을 메이저리그 심판 도전에 이제 첫 발을 내디뎠다. 그의 눈은 저 높은 곳을 향해 있다.
/홍윤표 OSEN 선임기자
사진=김재영 심판과 아버지 김종우 전 동국대 감독(김재영 심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