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연기가 하고 싶었다. 단역이든 엑스트라든 기회만 주어진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역할을 가리지 않고, 늘 성실히 임했다. 그리고 38살의 나이에 데뷔 6년 차가 된 오늘, 드디어 기억에 남을 법한 캐릭터 '최팀장'을 만들어냈다. 배우 이수련의 이야기다.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OSEN 사옥에서 SBS 수목드라마 '황후의 품격'(극본 김순옥, 연출 주동민)의 최팀장 역을 맡았던 이수련을 만났다.
극 중 최팀장은 태후전 비서팀장으로, 태후 강 씨(신은경 분)의 심복을 자처하는 인물이다. 최팀장이 태후 강 씨의 곁을 지키는 역할이다 보니, 이수련은 자연스럽게 신은경과 함께 전 회차에 출연하게 됐다. 이수련은 신은경과의 호흡을 묻자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붙어있었어요. 단독 신을 촬영하실 때면, 선배님께서 '최팀장 없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하실 정도였어요. 정이 많이 들었죠. 먼저 장난도 걸어주셨고요. 일상에 유머가 탑재돼있는 분이에요. 신을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고민하세요.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어요."
최팀장은 첫 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반성할 줄 모르는, 평면적 인물이다. 태후의 지시라곤 하지만 온갖 나쁜 짓을 하고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최팀장을 향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회를 거듭할수록 달라졌다. 최팀장의 악랄한 행동에 분개하던 시청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그를 귀여워하기 시작한 것. 이에 이수련은 "저는 정말 무섭게 보이려고 노력했다"고 해명했다.
"아무래도 최팀장의 악행이 실패로 돌아간 적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사실 태후를 가장 복장 터지게 했던 인물일지도 몰라요. 하하. 숨겨진 엑스맨 아니냐는 반응도 있더라고요. 묘하게 아군처럼 느끼신 것 같아요."
이어 이수련은 주동민 감독의 디렉션 덕분에 최팀장의 인간적인 면모가 한층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저는 감정을 더 표현하고 싶었다. 그런데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최팀장은 절제되고 깔끔한 인물이었다. 감독님의 지시를 따른 덕분에, 최팀장이 감정을 표출하는 신이 극명하게 도드라졌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최팀장만의 매력은 마지막 회 교도소 신에서 정점을 찍었다. 최팀장은 교도소에서 태후를 배신하고, 교도소 내 1인자에게 기생하는 삶을 택했다. 게다가 최팀장은 나왕식(최진혁 분)의 헤어스타일로 등장해 큰 웃음을 선사했다. 늘 깔끔한 묶음 머리를 고수했던 최팀장에겐 그야말로 파격적인 변신이었다.
"망가지는 걸 좋아해요. 왕식이 가발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썼어요. 처절하게 망가진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개연성이 없는 건 아니에요. 출소 후 미용실을 차리려고 미용을 배우다가 그렇게 된 걸 수도 있고요. 태후가 저를 보고 나왕식을 떠올리면서 괴로워하길 바란 걸 수도 있죠."
사실 이수련의 첫 직업은 배우가 아니다. 청와대 여성 경호원 1호 출신인 그는 10여 년간 3명의 대통령을 경호했다. 그에게 배우는 대개 안정을 꿈꾸는 30대에 두려움을 떨치고 내민 도전장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수련에게 망가진다는 것은 어떤 문제도 되지 못했다. 연기만 할 수 있다면 무슨 배역이라도 상관없는 그였다.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누가 봐도 예쁘거나 끼가 넘치는 사람이 하는 일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흘러가는 대로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운 좋게 경호실에 들어가게 됐고요. 열심히 근무했죠.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고요. 그런데 어떤 일이든지 10년 정도 하면 새로운 게 없잖아요. 저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삶을 못 견뎌 하는 편인데, 그때 연기가 생각났어요. 이때 연기가 제게 일로 느껴지더라고요. 셀러브리티만의 것이 아니었죠. 주인공이 아니라도 스타가 아니라도 해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재미있게 살아보고 싶었거든요."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는 것에 대해 주변인들의 걱정이 따를 법도 했다.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이수련이 신인 배우로 성공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수련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원했던 것은 '성공'이 아닌 '연기'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말리는 이유를 생각해봤어요. 보통 '잘 안됐다'고 말하는 게 아무도 절 알아보지 못하고, 평생 단역으로 살아가는 걸 뜻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진짜 하고 싶었던 건 연기거든요. 연기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그까짓 것 못할 게 뭐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닥을 치더라도 살 수는 있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진짜 이수련을 아는 이들은 오히려 그의 결정을 지지하고 믿어줬다. 이수련은 "오히려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걱정은 해줄 수 있는 건데, 해결책이 있는 걱정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제 사람들은 제가 하겠다고 말한 이상 '생각이 있겠지' 하고 믿어주셨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그러면서 이수련은 연기를 늦게 시작한 것이 흠이 아닌 득이라고 밝혔다. 10년의 사회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올곧게 연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다들 제가 10년 동안 경호원으로 일했던 경력을 버리고 나왔다고 해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많은 걸 가지고 나왔다고 생각해요. 내공이라든지 내면의 단단함 같은 거요. 덕분에 스스로 중심을 잡고 갈 수 있게 됐어요. 또 연기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이라는 걸 알 나이잖아요. 지금 나이에 배우가 된 건 축복받은 일이죠."
2014년 드라마 '피노키오'의 단역으로 데뷔한 이수련은 역할을 가리지 않고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그리고 '황후의 품격'을 통해, 처음으로 '청와대 경호원 출신 배우'가 아닌 캐릭터 '최팀장'으로 주목받았다. 덕분에 다양한 작품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그는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를 전했다.
"이제 시작인 단계죠. 아직은 이수련이라는 이름 앞에 '황후의 품격', '청와대 경호원' 같은 수식어가 꼭 붙어요. 수식어 없이 이름만으로도 믿음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올해 개봉되는 영화에도 많이 참여했어요. 저를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실 거예요. 하하." /notglasses@osen.co.kr
[사진] 최규한 기자 dreamer@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