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담(29)을 오랜 만에 만나니 전보다 한층 성숙하고 예의 바른 배우의 자세가 또렷하게 느껴졌다. 3년 전 연극 ‘렛미인’(2016)으로 예술의 전당에서 만났을 때 만해도 아직은 새내기의 풋풋함이 전해졌는데, 이제는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한층 성숙해졌다고 할까. 그녀의 자그만한 얼굴에서 거리감보다 친근함이 느껴진 이유다.
박소담은 30일 오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봉준호 감독의 신작 '기생충'으로 인터뷰 자리를 갖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날 개봉한 영화 ‘기생충'(각본감독 봉준호, 제공배급 CJ엔터테인먼트, 제작 바른손이앤에이)은 가족 전체가 백수인 기택(송강호 분)의 장남 기우(최우식 분)가 박사장(이선균 분) 딸(정지소 분)의 과외 교사로 입성하면서 두 가족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박소담은 기택의 차녀 김기정 역을 맡았다.
영화는 반지하에 살지만 서로에 대한 불평 없이 화목한 기택의 집안을 비추며 시작한다. 가족 구성원 전체가 직장이 없어 먹고 사는 게 가장 큰 걱정인데, 장남 기우가 박사장 딸의 과외선생으로 들어가면서 한줄기 희망을 찾는다. 그러고나서 차녀 기정(박소담 분)까지 미술 교사로 일자리를 구하며 본격적으로 '기생'하기 시작한다.
박소담은 “제가 아직 연기 경력이 얕아서 시나리오가 어땠는지 평가할 단계는 아닌데, 제가 보기에도 굉장히 잘 읽혔던 거 같다. 처음에 기정의 대사를 읽고 ‘혹시 감독님이 저를 잘 아시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사가 제 입에 잘 붙었다”라고 말했다.
봉준호 감독은 송강호, 최우식 등 배우들을 캐스팅 한 뒤 극중 두 사람의 딸이자 동생으로 박소담을 적극 고려했다.
“감독님은 먼저 배우 캐스팅을 하고 나서 시나리오를 쓰신다고 하더라. (시놉에서)어느 정도 (스토리 및 캐릭터를)잡아 놓으셨겠지만 구체적인 시나리오는 캐스팅이 된 이후에 받았다. 처음엔 ‘가족 얘기를 쓸 예정인데 송강호 선배의 딸, 최우식의 여동생으로 같이 하자’고 하셨다. 첫 얘기 이후 두 달 정도 얘기가 없으셔서 ‘다른 배우로 바뀌었나?’ 싶었다. 이후로도 드문 드문 연락을 주셔서 제가 나중엔 '너무 애가 탔다’는 말씀까지 드렸다. 근데 감독님이 ‘내가 분명 같이 하자고 얘기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되물으셨다. 저 말고도 다른 배우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감독님은 결정을 하셨는데 연락이 없어 저희만 애가 탔던 거다.(웃음)”
박소담은 ‘기생충’ 속 기정 캐릭터를 보고 자신의 성격과 비슷한 데다 기존에 했던 작품 장르 및 특색이 달라 덜컥 출연 욕심이 났다고 털어놨다. “그동안 센 역할을 많이 해서 그런지 제 목소리로 말하고 싶었다. 28세의 기정을 보니 평소 할 말은 하고 사는 제 성격과 비슷한 점도 있어서 이 역할을 빨리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라고 밝혔다.
지난 25일 오후(현지시간) 프랑스 뤼미에르 극장에서 열린 72회 칸 국제영화제 폐막식에서 심사위원단의 만장일치로 황금종려상은 ‘기생충’에게 돌아갔다. 올해 칸 영화제에 처음 다녀온 박소담은 “사실 아직도 얼떨떨하다. 제가 칸에 다녀왔고 모든 스케줄을 진행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내가 정말 칸에 다녀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내 자신이 낯설다”고 말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2013년 데뷔한 박소담은 2015년 개봉한 영화 '베테랑'(감독 류승완), '검은 사제들'(감독 장재현)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특히 '검은 사제들'에서 악마에 씌인 영신 역을 맡아 말 그대로 신들린 빙의 연기를 보여줘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 이에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에서 인신 여우상을 받았다. 2016년엔 춘사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부일영화상, 청룡영화상,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랬던 박소담이 데뷔 후 슬럼프를 겪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놀라운 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해준 '검은 사제들' 이후 연기에 대한 부담, 갈증을 느끼게 됐다고 털어놨다. 수업, 과제, 시험, 공연 등으로 바쁜 대학생활을 보낸 그녀는 휴학 한 번 하지 않고, 4년 만에 연극원을 졸업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대학 졸업 후 한 달에 17개씩 오디션을 볼 때가 있었다. 학교(작품)에서 주인공은 했지만 막상 실전에 나오니 저보다 잘하는 분들이 너무 많았다. 저는 대학 4년 동안 휴학 한 번 안 하고, 여행 한 번 안 가고 졸업했는데 계속 떨어지니 ‘내가 왜 이렇게 악착 같이 살았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 슬펐다. 그때 캐스팅이 된 영화가 ‘사도’와 ‘경성학교’였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박소담은 배우 송강호와 영화 ‘사도’(감독 이준익, 2015)를 통해 인연을 맺었던 바. 당시에는 같이 촬영한 회차가 3번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아쉬웠다고.
“당시 송강호 선배님이 ‘잘하고 있으니 계속 그렇게 해라’ ‘나중에 다른 작품으로 또 만나자’고 하셨다. 이번에 아버지와 딸로 만나니 마음이 편했다. 선배님이 딸처럼 대해주셨다. 좋은 얘기를 많이 해주셔서 인생 선배를 만난 느낌이다. 이젠 사소한 고민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됐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배운 것 많다(웃음).”
박소담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통해 촬영 현장에 한층 더 깊숙이 녹아드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제가 한창 달리던 3년 전에 ‘기생충’을 만났다면 이게 행복한 작업인지 깨닫지 못했을 거다. 예전에는 내 연기만 신경썼는데 ‘기생충’ 이후 달라졌다. 이번에 같이 한 스태프의 얼굴까지 다 외웠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됐다. ‘기생충’을 통해 연기에 대한 갈증도 많이 풀었고 행복해졌다”고 말했다./ watch@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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