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스포일러다’라는 말이 있다. 실제 역사와 실존 인물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의 결말은 이미 역사가 그 결말을 말해주고 있다는 뜻이다. 때문에 결말을 비틀기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역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는 실존 인물이 아닌 가상의 인물이 반전의 키를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몽’ 역시 마찬가지다. ‘이몽’은 일제 강점기 조선을 배경으로 일본인 손에 자란 조선인 의사 이영진(이요원)과 무장한 비밀결사 의열단장 김원봉(유지태)가 펼치는 첩보 액션 드라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독립운동 역사를 재조명하며 안방에 가슴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매회 시청자들의 심장에 뜨거운 전율을 일으킨 ‘이몽’에서 대표적인 실존 인물은 유지태가 연기한 김원봉이다. 이 때문에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독립을 위한 선조들의 마음은 더욱 뜨겁고 절절하게 시청자들에게 다가왔다.
일본인 손에 자란 조선인 여의사 이영진도 극적인 삶을 산 캐릭터지만 그만큼 더 극적인 삶을 살면서 반전을 선사한 인물은 남규리가 연기한 ‘미키’다. 미키는 경성구락부 재즈싱어로, 범접불가의 매혹적인 자태로 경성구락부 내 젊은 남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인물이다. 극 초반 이영진과 견원지간처럼 날을 세우지만, 진심을 알게 된 둘도 없는 절친이 된다.
남규리는 미키는 극적인 캐릭터다. 경성구락부에서 남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던 매혹적인 가수에서 경성의 정보를 손에 쥔 경성구락부의 주인이 된다. 이와 동시에 독립운동가의 밀정으로 성장한다.
철부지 재즈가수에서 독립운동가의 밀정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한 작품 안에서 캐릭터가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는 건 시청자들에게도 흥미롭지만, 이를 연기하는 배우에게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OSEN과 만난 남규리는 ‘미키’를 연기한 것은 ‘도전’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이와 함께 연기를 하면서 어려웠던 점도 밝혔다.
“대본을 받았을 때 전체적인 시나리오도 좋았지만, 제가 시대극 같은 색채가 강한 작품에 열망이 있었어요. ‘암살’, ‘색계’, ‘화양연화’ 같은 작품을 좋아하거든요. 분위기 강한 작품을 좋아하는 편이죠. 제가 막연하게 ‘언젠가는 작품에서 가수를 연기할 날이 올까?’ 생각했었는데, 미키가 그런 캐릭터라는 점도 끌렸죠. 칼보다는 바늘처럼 찌를 수 있는 연기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달콤하지만 쿨하게 연기할 수 있는 부분이 미키라는 캐릭터를 선택한 이유에요.”
“더 무겁고, 재즈풍의 노래를 처음부터 할 줄 알았는데, 미키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해서 처음에는 보컬톤을 소녀처럼 가져갔어요. 깨끗하게 불렀어야 했는데, 소울 짙고, 노련한 목소리가 나와서 많이 수정을 하곤 했어요. 씨야로 활동했을 때부터 감성 자체가 소녀는 아니었는데, 깨끗하고 맑게 노래하려고 하니까 힘들었어요. 하지만 재밌었던 건 제 노래가 끝나면 다같이 춤을 췄어요. 무거운 분위기에 제가 즐거움, 기쁨을 선사한 것 같아 재밌었어요.”
미키의 성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몽’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이해가 힘든 부분도 있다. 후쿠다(임주환)을 두고 삼각관계를 형성했던 이영진과 절친이 되는 과정이었다. 깊이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지점이지만, 조금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두 사람의 사이다. 이에 대해 남규리는 두 사람의 공통점과 공감대를 ‘절친’ 포인트로 꼽았다.
“시청자들이 보기에 어떤 사건이나 개연성이 없어서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죠. 연기를 하면서 그런 점을 많이 생각했어요. 대본이 나올 때마다 미키와 이영진이 친해지는 개연성을 찾았어요. 두 사람의 공통점은 억압받던 시기에 양아버지 밑에서 살았다는 점이에요. 과연 행복했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겼어요. 서로를 보며 연민을 느꼈을 거에요. 각자 색은 다르지만 막연하게 연민과 공감대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후쿠다에 대한 사랑 또한 그래요. 미키는 음지에서 살아야 하는 인물이었어요. 하지만 이영진은 여의사라는 훌륭한 인생을 살고 있죠. 여성으로서의 질투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후쿠다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됐는데 그 남자의 시선마저 이영진이 가져갔죠. 막연하게 미운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질투라고 생각해요. 미키는 다 가지지 못한 사람이지만 가진 척 해야 했죠. 그래야만 살 수 있으니까요. 그런 마음이라고 생각하니까 연기할 때도 개연성이 생겼어요.”
캐릭터가 성장하는 과정 뿐만 아니라 남규리의 스타일을 보는 것도 ‘이몽’의 관전 포인트였다. 경성구락부 내 젊은 남성들의 시선을 쓸어담는 남규리만의 미키 스타일은 직접 고른 것이었다. 특히 미키가 성장하는 과정을 옷으로 보여주기도 했다는 점에서는 남규리의 연기 열정과 노력을 알 수 있었다.
“성숙해지는 단계에 따라 옷을 선택했어요. 의상과 헤어는 ‘이몽’ 팀에서 해줬어요. 의상팀이 가져온 옷 중에서 미키의 감정에 따라 선택을 했어요. 연기하는 내내 그렇게 했는데, 종방연 때 의상팀에서 많이 놀랐다고 했어요. 저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는데 감정에 맞춰서 옷을 선택하는 걸 보고 더 디테일하게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해줬어요. 저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제가 그렇게 안 보였었나봐요.”
“헤어는 ‘색계’ 탕웨이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제가 쉬는 시간이 있으면 재밌게 본 작품을 또 보거든요. ‘색계’를 보는데 어릴 때 보는 느낌과 달랐어요. 그런데 탕웨이의 머리를 보니까 ‘미키마우스’ 머리를 거꾸로 한 느낌이었어요. 발상이 엉뚱하게 떠오른거죠. ‘내가 미키다!’라는 느낌의 머리였어요. 현장 반응도 좋아서 꾸준히 하게 됐고, 저만의 ‘미키’ 아이덴티티가 생긴거죠. 옷은 매번 바뀌지만, 헤어는 ‘저건 미키다!’라는 느낌이었어요.”
이런 남규리의 노력은 미키를 ‘이몽’에서도 독보적인 캐릭터로 완성했다. 남규리는 분석과 노력을 바탕으로 오묘한 표정과 눈빛, 매력을 더해 남규리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미키를 만들어냈다. 때문에 ‘이몽’ 결말에 대해서도 만족하는 남규리다.
“제가 원하는 미키의 모습으로 마무리가 됐어요. 주체적이고, 멋진 밀정이었어요. 나름대로 미키만의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방법으로 마무리가 됐어요. 시대극도 처음이고, 작품에서 가수를 연기한 것도 처음이라 의미가 있고, 잘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성취감을 느껴요. 캐릭터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기에 시원섭섭하지만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와 함께 남규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방송된 ‘이몽’의 의미를 짚었다. 방송 전부터 김원봉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해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남규리는 그 점에 포커스를 맞추는 게 아니라 지금의 자유를 있게 한 선조들을 봐달라고 당부했다.
“논란이 된 건 사실이고, 부정할 수 없죠. 하지만 이것만 생각해주셨으면 해요. 흔히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말고, 그 시대의 누려야 할 삶을 살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요. 그 분들이 싸워주시고, 노력해주신 덕분에 지금 저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선물 같아요. 당시 억압받던 시대에 소소한 일상마저도 살 수 없었던 선조들의 모습을 봐주셔으면 해요. 견뎌주신 분들 덕분에 우리가 있는게 아닐까요?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되네요.” /elnino8919@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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