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 일본 출장을 위해 김포발 하네다행 비행기 티켓을 지난 5월쯤 일찌감치 예매했다. 시간이 넉넉히 남았음에도 추석 연휴 무렵이라, 남은 자리가 많지 않았다. 가격도 비쌌고. 갑자기 일정을 조정해야돼 이번 주초 항공사 예매 사이트에 다시 들어갔다. 지난 달 예매 당시, 기자가 원하는 시간대에 좌석 여유분이 없었던 기억이라 취소 전에 표부터 다시 끊었다. 이게 왠일. 빈 자리는 많았고 결재가 끝난 뒤 보니 가격도 훨씬 쌌다. 결과적으로 취소 수수료를 물고도 훨씬 남는 장사를 했다. 뉴스로만 대하다가 '요즘 대일감정이 이렇구나'라는 걸 실감한 경험이다.
이 대목에서 다음 주 개봉하는 '나랏말싸미'가 떠올랐다. '명량'처럼 배 12척으로 나라를 구하는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영화도 아니고 '말모이'처럼 일제 강점기의 우리 말 지키기를 다룬 작품도 아니다. '나랏말싸미' 제목 그대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과정에 재미와 감동을 입힌 드라마일 뿐. 그런데 한일 갈등의 와중에 왜 '나랏말싸미'?
기자가 코흘리개 어린이였을 때도, 질풍노도의 성장통을 앓던 중고생 때도, 독재타도를 외치던 대학생 때도, 서소문 빌딩숲에서 하얀 두루마리 화장지가 눈처럼 휘나리던 6.29 선언 당시에도 늘 한국인의 대일 감정은 애증에서 증이 몇배 더 강했다. 고대 이후로 늘 멀고도 가까운 나라였다. 그런 일본과의 국가대표 축구는 절대 져서는 안됐고 일본 내 혐한류의 망언 망발이 나올 때면 국민 정서가 들끓었다. 반복의 역사다.
기자 초년병 시절,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격앙된 마음으로 '기자수첩'을 썼는데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사단이 났다. '일본 문화의 잔재를 단도리해야된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십년전 일이 아직도 머리에 생생한 건, 데스크에게 눈물 쏙 빠지게 혼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멍청해도 그렇지, 한국 문화에 남은 일본 강점기의 잔재들을 비판하면서 '단도리'하라니.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창피함에 자다가도다 벌떡 깬다. 닭볶음탕(닭도리탕) 대하기조차 부끄럽다.
1990년대 초반이었다. 신문사 편집국에서조차 '게라' '사쓰마와리' '도쿠다니' 등 일본말을 그대로 쓰곤 했다. 일본어 공부를 따로하지 않아도 웬만한 단어는 그냥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네 일상에 36년 강점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눈 깜빡할 사이의 시간이 흐른 것같은데 지금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자신들의 언어를 지키고 가꾸면 그 민족은 살아남는다. 고등학교 때 한족을 지배하고도 자신들의 말(언과 마 둘다 아닐까 싶다)을 잃어버려 이제는 존재조차 희미해져버린 만주족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교육받곤 했다. 그런 면에서 당장의 일본 상품 불매운동과 관광 중단 등에도 의미가 있겠지만 먼저 한글, 나랏말싸미의 의미부터 되살리면 어떨까 싶다.
의도한 바 없이 현 시국에 막을 올리게 된 '나랏말싸미'는 다행히 잘 만든 영화다. 제작비만 100억원 이상이 들어갔다. '동주' '사도' '박열'의 이준익 감독과 오랜 영화 인생을 동고동락한 조철현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송강호 박해일 등 명품 배우들의 열연으로 작품에 무게를 더했다. 제작과 배급 관계자들도 충무로 외길 인생들이 참여했다.
모든 것을 걸고 한글을 만든 세종과 불굴의 신념으로 함께한 사람들, 역사가 담지 못한 한글 창제의 숨겨진 이야기를 스크린에 오롯이 담았다. 픽션과 실제 역사를 백종원식 레시피마냥 적절한 비율로 요리했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신미(박해일)는 해인사의 대장경판을 지키는 스님으로, 불경을 기록한 소리글자인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파스파 문자에 능통한 인물. 문자 창제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던 세종(송강호)은 신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그는 한양 안에 불당을 지어주는 조건으로 두 제자인 학조(탕준상), 학열(임성재)과 새 문자 창제를 함께하게 된다.
올 여름, 극장가 대목이다보니 재미있는 영화들이 차고 넘치지만 '나랏말싸미'도 이런저런 이유로 추천 한 표를 드리고 싶다. /mcgwire@osen.co.kr
[사진] 영화 스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