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연휘선 기자] 작품에선 소름 끼치는 연기로 시청자를 떨게 하더니 실제로는 연기와 가정만 생각하는 성실한 배우와 자상한 아빠의 얼굴만 있다. '99억의 여자'에서 아내를 학대하는 남자 홍인표 역으로 열연한 배우 정웅인의 이야기다.
정웅인은 23일 종영한 KBS 2TV 수목드라마 '99억의 여자'에서 홍인표 역으로 열연했다. 그는 마지막 회 방송 당일, 종영에 앞서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의 한 카페에서 취재진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홍인표 역으로 지난해 KBS '연기대상'에서 미니시리즈 부문 남우조연상까지 받은 정웅인이지만, 정작 '99억의 여자'를 출연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타이틀 롤 정서연(조여정 분)을 얼음물에 담그는 등 지나치게 잔혹하고 아내를 학대하는 역할이 부담스러웠기 때문. 특히 아내는 "이제 좀 신경 써야지. 애들도 커가는데"라며 반대하기도 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웅인이 '99억의 여자'를 선택한 건 과거 KBS 1TV 대하사극 '근초고왕'을 함께 하며 자신을 KBS와 인연을 맺게 해 준 김영조 감독과의 의리 때문이었다. 출연을 고사하고 있던 차에 거듭 걸려온 섭외 전화에 '운명' 같은 느낌마저 받았다고.
특히 정웅인은 "초반 대본 리딩 때 그랬다. 지상파 드라마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고. 왜냐하면 요새 지상파가 너무 안 됐다. 3사가 다 너무 침체된 분위기였다. 케이블 TV나 종편이 왕성하게 활동할 때라. 저도 SBS에서 신인상 받고 MBC에서 드라마 많이 해서 지상파 부흥을 해보고 싶다고 던졌다"고 밝혔다. 그는 "다행히 '동백꽃 필 무렵’이 그렇게 잘 되면서 저희가 그 드라마를 업고 가는 느낌이 돼서 좋았다. 여러 가지가 잘 어울린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다만 작품 안에서 아쉬움도 있었다. "인물이 너무 많이 나오긴 했다"는 그는 "정리돼야 할 인물들이 정리가 늦게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도 드라마 경력이 20년 다 돼가는데 '있는 인물을 더 강하게 살리고 99억을 과연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풀면 초반에 강했지만 강함과 따뜻함 미스터리를 잘 버무릴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그럴수록 정웅인은 캐릭터와 연기에 집중하며 확신을 얻었다. 홍인표와 실제 정웅인이 반대일수록 "연기는 연기"라며 간극을 좁히고 어색함을 없애기 위해 집중한 것. 제작진 또한 카메라 앵글도 긴장감 있고 그로테스크하게, 조명도 보다 심도 깊게 잡아줬다는 그다. 아내와 아이들도 잔인함 때문에 '99억의 여자'를 보지는 못하게 했지만 주위에서 홍인표 역할에 대해 듣고 놀라며 역할에 대해 같이 고민했다. 홍인표가 땅에 파묻혔다가 부활하는 장면에서는 아이들과 같이 회의도 했다고.
그 덕분에 해당 장면은 정웅인에게도 유독 힘들었지만 보람 있는 장면으로 남았다. 정웅인은 "흙에 파묻히는 신을 찍을 때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고 그 안에 나무 곽을 짜고 들어갔다. 그 위에 자루를 깔고 흙을 수십 센티 덮었고, 제가 아래에서 칼로 자루를 찢고 팔을 뻗어서 나오기로 상의했다"며 당시 촬영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밑에서는 자루를 액션팀 두 명이 잡고 있었다. 핸드폰 플래시 하나 켜놓고. 그런데 흙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안에서 무전기로 '여기 상황 안 좋으니까 걷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는데 포클레인 소리 때문에 밖에선 들리지도 않고, 흙이 계속 입으로 들어오더라. 그냥 해보겠다고 팔을 뻗었는데 어떻게 되긴 됐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어 "다음 날 아침 기침할 때 흙이 코에서 나오더라. 그때 촬영지가 김포였는데 김포의 흙이 판교에서 나온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제 나름의 투혼이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정웅인은 "제 나이에 그런 연기를 한다는 게 두렵지만 좋은 게 있다. 뭐냐 하면 제 나이에 연기를 하면서 제일 경계하는 게 '매너리즘’에 빠지는 거다. 타성에 젖는 것. 나태해지는 것. 거만해지는 것. 이 세 가지를 가장 경계해야 한다"며 해당 장면이 배우로서 큰 도움이 됐음을 강조했다. 그는 "땅 속에 묻히는 장면이 나왔을 때 거부하는 연기자들도 있을 거다. 죽지 않으면 살아 나올 텐데 흙을 뚫고 나와야 하는 거다. 겨울에 찍는데. 그런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또한 "연기가 점점 더 갈수록 어렵다기 보다도 점점 더 디지털화되다 보니까 아날로그적인 감성도 없어지니까 연기자는 어떤 식으로 변화를 맞아야 하나 고민된다. 차도 디젤에서 하이브리드, 전기 가솔린, 전기 차가 나오는데. 차는 발전하는데 연기는 어떻게 발전해야 하나. 고민해봤더니, 제 나이로 갈수록 저 드라마에서 열심히 하는 게 보여야 하는 게 가장 크다. 그런 면 속에서 경계해야 할 게 세 가지가 있다. 그래서 땅 속에 묻히는 것들도 과감성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런 정웅인에게 실제로 99억 원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까.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며 당황한 정웅인은 흔히 나올 법한 '건물주' 같은 꿈에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힘들다"며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는 30억 원 정도는 찍고 싶은 영화를 만들고, 나머지는 불안정한 미래를 위해 아껴두고 싶다고 했다. 첫째 세윤 양이 올해로 중학생이 되는 만큼 사춘기 청소년의 시각에서 배우 김윤석 첫 연출작으로 화제 됐던 영화 '미성년' 같은 작품도 찍어보고 싶다는 것.
그는 "원래는 대학로에 극장을 갖고 싶었는데 요새 극장은 빚지는 것 같아서 안 될 것 같다"며 배우로서 연극의 꾸준한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발전이 있으려면 틀에 박히면 안 될 것 같다. 야구선수는 밤에 나가면 방망이 휘두르는 연습을 하면 되는데, 연기자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공연을 해야 한다. 또 영화를 해야 한다. 영화는 또 다르다. 감독이 정웅인한테 요구하는 것들에 대해서 기억하고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연극은 신체적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운다. 연극은 모든 장면이 바스트샷이 아니라 풀샷이다. 발가락도 감정이고 손가락도 감정이 된다. 배우, 연기자가 몸으로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다. 풀샷에서 저 사람의 몸에서 저 사람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게. 발성도, 지금은 오디오 시스템이 좋아서 작게 얘기해도 다 들리지만 정확한 건 연극에서 배울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연극은 작은 꿈이 아니라 큰 꿈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지금 제 위치가 좋다"는 정웅인은 "지금 위치가 유지되게끔 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그는 "주연이지만 조연상을 받는 것도 행복하고, 역할에 대해 계속 고민한다. 이번에 현대극을 했으니 다음엔 사극을 해야 하지 않나 고민한다. 그러면서도 텀이 길어지면 원치 않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게 크게 잘못인 건 아니다. 가정의 행복이 중요하니까. 그리고 꿈이 아니라 생활을 위해 달리는 분들도 많으신데 저는 얼마나 행복한 건가"라며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
나아가 그는 높은 만족에도 꿈을 꾸는 것에 대해 "그래도 언젠가 아이들이 다 성장한 다음에 제 나이 한 65세되면 새로운 꿈을 꿀 수도 있을 거다. 그런데 지금 꿈을 아예 접으면 그때 싹이 자라나지 않을 것 같다. 지금부터 영화도, 연극도 놓지 않고 계속 꿈을 키워가야지 제가 정말 가장의 끈을 놨을 때 그런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홍인표는 사라지고 또 다른 역할을 기대하게 만드는 배우 그리고 가장인 아빠 정웅인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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