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 야금야금 다가오고 있다. 10월 30일이면 탈락하는 구단의 선수들을 볼 수 없게 된다.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저마다의 다짐과는 상관없이, 그 선수들은 당분간 하릴없이 야구장을 떠나야 한다.
이미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된 한화 이글스와 SK 와이번스, 삼성 라이온즈는 사실상 2021년 시즌을 대비한 체제로 들어갔고, 5강 턱걸이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KIA 타이거즈나 롯데 자이언츠도 마지막 줄타기를 하고 있다.
한국프로야구가 1982년 출범 이래 올해만큼 혹독한 시련을 겪은 적은 없었다. 난생처음 맞닥뜨린 세기적인 역병, 코로나19 사태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구단이 당혹했고, 곤욕을 치렀다. 더군다나 이 괴질은 KBO리그에 ‘부상자 신드롬’마저 불러일으켜 리그 판도를 온통 뒤흔들었다. 시즌 막판이 되면 어느 해나 선수들이 으레 자잘한 병치레를 하게 마련이지만 올해처럼 장기간 전열에서 이탈하거나 아예 리그를 접은 선수가 속출한 해는 없었다.
부연하자면, 올해 KBO리그를 관통하고 지배한 공통어는 ‘부상자’였다. 허삼영 삼성 감독은 주전들의 잇따른 부상으로 시즌을 망쳤다고 아퀴지었으나, 비단 삼성뿐만 아니라 다른 구단들도 지겹도록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상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코로나19 역병 사태와 맞물려 부상자 숫자도 숫자지만 구단마다 핵심 전력들의 이탈은 팀의 명운을 좌우할 정도로 그 악영향이 컸다. 얼마 남지 않은 시즌에 만약 부상으로 인한 주전 이탈이 또 발생한다면, 그 구단은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다.
KBO는 올해부터 부상자 명단IL(Injured List)을 공식적으로 도입했다. 다른 해와 비교할 통계 자료는 없지만, 10월 12일 현재 KBO 부상자 명단에 등재된 선수는 동일 건으로 연장 신청된 수를 빼더라도 무려 258명에 이른다. 과장된 표현을 쓰자면 엄청난 숫자이고, 구단별로 1군 엔트리를 구성할 숫자에 육박할 정도다.
서른 명이 넘은 구단도 3팀(LG 33, 삼성 32, 두산 30명)이나 됐다. 그 뒤를 이어 KIA 28, SK 27, 한화 이글스 25, 키움 히어로즈 24, kt 위즈 21, NC 다이노스 20명이었고, 유일하게 롯데만 20명을 밑돌아 18명이었다. 구단별로 15게임 안팎으로 남겨 놓은 정규리그지만 여전히 하루가 멀다고 부상 선수들이 갈마드는 실정이다.
단순히 부상자가 많고 적음이 반드시 팀 성적과 비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주전 선수들의 이탈이 많았던 구단은 어찌 보면 당연하겠으나, 대체로 팀 성적이 저조했다. 주전들의 이탈이 잦았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뒤를 받쳐줄 대체요원의 층이 두꺼운 구단은 그런대로 버텨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일이 나열하기도 숨찰 지경이다. 올해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지난해 챔피언 두산은 시즌 초부터 선발투수 이용찬의 이탈을 신호로 외국인 투수 플렉센이 두 달간 장기 결장하는 바람에 선발 로테이션에 애를 먹었다. 게다가 두산은 오재일, 허경민 등 주축 타자들의 부상으로 5강권 언저리에서 고전하고 있다.
LG는 차우찬이 여태껏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데다 중심타자 채은성과 김민성, 이형종도 장기간 이탈했고, 그에 따라 팀 타선이 들쭉날쭉했다. 올해 가장 눈 비비고 다시 봐야 할 팀이 된 kt는 시즌 중반에 마무리 김재윤의 이탈로 고생했고, 2위로 한창 치고 올라가다가 최근 주전 2루수 박경수의 햄스트링 부상으로 주춤거리고 있다.
리그 단독 1위를 지키면서 사실상 한국시리즈 직행을 예약한 NC는 주포 나성범이 빠졌다가 복귀했으나 시즌 초반에 토종 투수로 가장 유명세를 날렸던 구창모가 아직도 복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뼈아프다. 그밖에도 KIA는 김선빈, 류지혁, 이창진, 삼성은 구자욱, 김상수, 이원석, 김헌곤, 백정현, 장필준이, 한화는 주전 유격수 하주석, 느닷없는 감독 퇴진으로 소용돌이에 휩싸인 키움은 주포 박병호와 주전 투수 최원태의 이탈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염경엽 감독의 와병으로 지리멸렬한 SK는 시즌 내내 외국인 투수 닉 킹엄, 외국인 타자 타일러 화이트, 2019 구원왕 하재훈, 주포 한동민과 주전 포수 이재원, 외야수 고종욱에다 대체 내야수 최항까지 줄줄이 부상자 명단에 오르며 바람 잘 날 없는 한 해를 보냈다.
은퇴선수협회 회장인 이순철 SBS 해설위원은 올해 유난스러운 부상자 급증의 원인에 대해 “코로나 사태의 영향으로 3월 말에 정상적으로 시즌 개막을 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거기에 초점을 맞추었던 선수들이 길어진 훈련 과정에서 리듬이 깨졌다”면서 “언제 시즌을 시작할지 몰라 지루하게 기다리며 훈련량만 쌓다 보니 훈련 피로만 더 쌓이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고 진단했다. 한마디도 총체적인 조절 실패라는 얘기다.
현학적인 수사를 인용하자면, 독일 철학자 니체는 “내 몸은 나의 전부이며,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영혼이란 몸의 어떤 면을 말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갈파했다. 흔히 프로야구에서 ‘멘탈(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실제론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정신을 지배한다.
선수가 한 번 몸을 다치면, 그 재활 과정은 그야말로 자기 자신과 지루한 싸움을 이겨내야 한다. 글자 그대로 ‘극기(克己)’다. 큰 고통을 넘어 미세한 고통마저 가라앉힐 때까지 인내를 거듭하는 고난의 과정이다. 신선도 수련법인 혈기도 창시자 우혈 선생은 “몸이 나의 주인이다”고 규정했다. 비유컨대, 부상자들은 주인인 몸을 제대로 간수 하지 못한 셈이다.
2020년 프로야구판은 ‘부르지 못한 이름’으로 마냥 신음한, 어두운 그림자로 출렁인 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글/홍윤표 OSEN 고문
사진/ 구창모(위)와 차우찬(아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