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야구단 사장을 지낸 어떤 이가 새 감독 면접을 볼 때의 일이다. 그 후보자가 첫 만남에서 대뜸 자기 몸값이 비싸다면서 돈 얘기부터 꺼냈다. 내심 앞으로 선수단을 이끌고 갈 운영 방향이나 선수단 지도, 관리 방법 따위의 구상을 들어보려고 했으나 부질없는 기대였다. 그는 훗날 감독 후보자의 말에 불쾌감을 지울 수 없었노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심지어는 어떤 단장 후보자도 만나자마자 첫마디가 “돈은 얼마나 주느냐”는 식이었다. 그의 유명 야구인에 대한 인상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프로는 돈이다’는 명제를 지도자의 권위와 능력으로 치부하는 것에 대해 무턱대고 비난하기는 어렵다. 계약 조건은 구단과 당사자가 협상해서 결정하는 것이므로. 그렇다고 (성적 하락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구단의 경영진에게 돈 얘기부터 꺼내는 것은 무례를 넘어서는 행위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 이래 2000년대까지는 이른바 ‘4김(김영덕, 김응룡, 김성근, 김인식)’ 지배시대로 볼 수 있다. 그들은 나름의 실력과 카리스마를 지녔던 지도자로 대개는 팀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김응룡 감독은 해태구단에서 무려 18년간이나 재임한 뒤 삼성과 한화의 부름을 받고 팀을 옮긴 이력이 있다. 가장 연장자인 김영덕 감독은 OB(두산 전신) 창단 감독을 거쳐 삼성과 빙그레(한화 전신)에서 장기 집권했다.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김성근 감독은 OB→태평양→삼성→쌍방울→LG→SK→한화 등 무려 7개 구단을 섭렵했다. 김인식 감독도 쌍방울 창단 감독을 시작으로 OB와 두산에서 9년, 한화에서 6년간이나 재임했다. 그들의 기본 계약 기간은 3년이었다.
이들 명망가가 주도했던 그런 시절이 분명히 있었지만, 이제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 얘기가 됐다. 요즘 같으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노릇이다.
류중일 감독이 계약만료로 떠난 LG 구단의 지휘봉을 새로 잡은 류지현 감독의 계약 기간은 2년이고, 염경엽 감독이 건강 문제로 물러난 자리에 앉은 김원형 SK 신임 감독도 2년이다.
NC를 창단 9년 만에 한국시리즈 정상으로 이끈 이동욱 감독은 올해 재계약을 했으나 그 기간은 다시 2년이었다. 올해부터 처음으로 감독을 맡은 허삼영 삼성 감독, 허문회 롯데 감독, 도중 하차했던 손혁 키움 감독도 모두 2년 고개를 넘지 못했다.
다만 뚜렷한 성과를 냈거나 우승 경력이 있는 감독은 임기가 3년이다. 올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팀을 사상 첫 6년 연속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던 김태형 두산 감독의 경우 2015년 첫 감독 계약 때는 2년이었으나 3차례나 한국시리즈 우승의 빛나는 훈장을 단 덕분에 3년, 3년으로 계속 연장이 됐다. 이강철 KT 감독도 애초 2년 계약(실제로는 2+1설이 있음)이었고, 올해 구단 사상 첫 정규리그 2위 도약을 기리기 위해 3년으로 재계약했다.
근년 들어 너나 할 것 없이 각 구단은 새로 시작하는 감독 계약 기간을 ‘묻지마 2년’으로 정하고 있다. 짧은 계약 기간에 성적이 나지 않으면 여론의 등쌀에 감독들은 견디지 못하고 물러난다. 구단도 손쉽게 내친다. 구단이 애써 위험 부담을 떠안지 않으려는 고육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믿는 도끼’로 여겼건만, 갈등과 마찰을 빚은 감독들이 구단과 팬들에게 실망감만 잔뜩 안겨주고 하릴없이 사라진 사태가 비일비재로 일어난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선수만 먹튀가 있는 게 아니라 지도자도 그런 사례가 많다. 구단이 위험 부담을 덜기 위해 짧은 계약 기간을 내세우는 것이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물론 그에 대한 반론도 있다. 거침없는 직언, 쓴소리로도 유명한 이순철 SBS 해설위원 같은 이는 “구단들이 무슨 공식처럼 감독 계약 기간을 2년으로 정해놓았는데, 감독이 제 색깔을 드러내기에는 너무 짧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2년 계약이 대세로 자리 잡은 것은 구단들의 책임 회피용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한 구단의 고위 관계자는 감독 계약 기간을 2년으로 정하는 추세와 관련, “임기 첫해를 보면 그 감독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고, 전망도 내릴 수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라며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강조했다.
올해 정규리그가 끝난 다음 감독 자리가 비어 있던 여러 구단이 선동렬 전 대표팀 감독 같은 유명 지도자들을 후보로 올려놓았으나 구단들은 프랜차이즈 선수 출신을 선택했다. 이를 두고 야구계 일각에서는 명망가 퇴조의 신호로 받아들이면서 아쉬움을 나타냈다. 권위가 아닌 소통을 중시하는 지도자를 선호하는 게 대세처럼 됐다. 지금은 ‘감독 흥행’이 사라져 가는 시대다.
글/홍윤표 OSEN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