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이 참 많았죠. 10m를 걷지 못해서 누워만 있기도 한 적이 있고 외면받은 시절도 있었죠.”
김현욱(50) 전 LG 트윈스 투수 코치는 최근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서 ‘몸 편한 야구’ 아카데미를 열고 프로를 지향하는 꿈나무들을 가르치고 있다. 올해까지 LG에서 코치로 소임을 다하고 건강한 야구 뿌리를 만들기 위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꿈을 키우는 어린 선수들을 보고 있으니, 불현듯 옛 기억도 떠오른다.
1993년 삼성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고 프로 선수가 돼 20승 투수로 이름을 알렸던 김 코치는 아픈 기억을 먼저 되돌아봤다. 김 코치는 OSEN과 인터뷰에서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허리 수술을 하고 10m도 걷지 못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 꿈의 프로 무대 입성&시련&기회
김 코치는 한양대를 졸업하고 1993년에 2차 3순위로 삼성의 지명을 받고 프로 무대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입단 첫해 6경기에서 평균자책점 2.45를 기록했다. 고작 11이닝을 던졌고 4실점(3자책점)했다. 보잘 것 없는 프로 데뷔해 성적이었다. 그리고 신고선수로 전환이 됐고, 두 번째 기회는 1995년에 찾아왔다.
정확히 말하면 간절했던 김 코치가 이를 악물고 기회를 만들었다. 1995년 트레이드로 삼성을 떠나 쌍방울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김 코치는 허리가 아파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김 코치는 “1995년 쌍방울로 팀을 옮긴 후 5월부터 2군에 있다가 허리가 아프다고 하니 집에 가라고 했다. 그래서 집에서 누워 있기만 한 적이 있다. 그러다 내가 ‘꾀병’이 아니라 진짜 아픈 것을 알고, 8월에 다시 팀에 합류시켜 관리를 받았다. 정말 열심히 했다. 그러다가 김성근 감독님을 만났다”고 회상했다.
# 쌍방울과 김성근 감독, 꽃 피운 ‘20승 투수’
김성근 전 감독(78)은 1995년 10월 쌍방울 감독으로 부임했다. 김성근 감독이 쌍방울 지휘봉을 잡은 이후 김 코치의 인생에도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김 코치는 “당시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데 감독님이 외면하고 그냥 지나가신 적이 있다. 더 이를 악물었고, 그해 제주도 훈련을 가서 감독님 팔을 잡았다. 그렇지 않으면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님을 붙잡고 ‘폼 한번 봐주세요’라고 했다”고 절박한 심정이었던 당시를 떠올렸다.
김 코치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김 코치는 “선수들에게 해주는 이야기 중 하나는 ‘막힌 게 있으면 반드시 뚫어야 한다’이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나를 알려야 한다. 당시 김성근 감독님에게 나를 알리고 싶었다. 내가 스스로 감독님에게 다가갔고, 그리고 감독님은 나를 30분 정도 봐주시고 가셨다. 그다음 날부터는 내가 투구할 때 뒤에서 보셨다. 그전에는 한 번도 보지 않으셨는데... 그리고 그다음 해 1군에서 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 코치와 김성근 전 감독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김 코치는 1996년 다시 1군 마운드에 섰고, 49경기에 등판해 4승 1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2.63을 기록했다. 모두 구원 등판으로 이뤄졌다.
허리 수술로 눈물을 훔치던 김 코치의 인생도 프로 야구판에서 새삼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김 코치는 “1996년 스프링캠프도 가고, 1군에서 데뷔 첫 세이브도, 롯데전에서 데뷔 4년 만에 첫 승도 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20승. 김 코치는 “변화구가 갑자기 잘 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끊임없이 훈련을 했다. 어느 순간 타자들이 못 치기 시작하더라. 계속 커브를 던졌다. 눈 감고 던져도 스트라이크가 될 정도로 반복 훈련을 했다. 1997년, 70경기에서 20승 2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1.88을 기록했다. 모두 157⅔이닝을 던졌다”고 전성기 시절 기억을 꺼냈다.
# 만들어준 20승 논란&무관의 설움
그 해 김 코치는 골든글러브는 물론 어떠한 상도 받지 못했다. 김성근 감독이 만들어 준 20승, 혹사 논란이 붙어 다녔다.
김 코치는 그 당시 기억을 떠올리면서 아쉬운 속내를 털어놨다. 김 코치는 “6연투도 해보고 일주일에 4승도 해봤다.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혹사 기준과 만들어준 20승에 대해서다”라며 “선수마다 어깨 상태가 다르다. 연투가 충분히 가능한데 혹사 논란이 생기기도 한다. 2연투, 3연투보다 투구 수를 살피기도 해야 한다. 그런 점을 고려했을 때 나는 혹사를 당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만들어준 20승? 내가 중간에서만 던지고 20승을 챙겼는데, 어떻게 승리를 내가 챙겼겠는가. 2~3경기만 선발투수에 이어 바로 등판했고, 주로 중간에서 1~2이닝 던지고 있으면 타선에서 경기를 뒤집어 줬다. 그렇게 구원승이 많아졌다”고 밝혔다.
승리조가 아닌, 추격조 개념에서 마운드에 올랐다가 적어도 1~2이닝 동안 팀이 역전할 수 있는 상황으로 김 코치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랬기에 승리도 김 코치가 챙길 수 있었다. 김 코치는 “팀이 지고 있는 상황에 올라갔다가, 내가 막고 경기가 뒤집어진 경우가 많다”고 강조했다.
김 코치는 “통산 71승 모두 구원으로만 거뒀는데, 선발투수가 5이닝 미만으로 이기는 상황에서 내가 이어 받은 경기는 3~4경기 뿐이다. 만들어줬다는 표현은 내게 억울한 것이다”고 토로했다. 이어 “김성근 감독님이 지바 롯데에 계실 때 일본 기자들을 향해 ‘이 선수가 나 때문에 20승을 하고도 상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더라”고 덧붙였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1997년을 화려하게 보낸 김 코치는 이후 순탄한 선수 생활을 보냈다. 무릎 통증을 겪은 시간도 있었지만, 성공적으로 복귀해 불펜 중심투수로 활약했다. 적어도 2004년까지는 그랬다.
김 코치는 “2004년이 내가 FA가 되던 해라 욕심이 있었다. 그 즈음 팔에 손상이 있었는데, 주사를 맞으면서 계속 던졌다. 그러나 그해 5월 팔꿈치가 너무 아파 당시 선동렬 투수 코치에게 말하고 2군에 갔다. 그리고 검사를 받았는데 인대가 끊어졌다는 결과를 받았다. FA를 앞두고 인대가 끊어진 줄도 모르고 참고 던졌던 것이다”고 말했다.
# 다시 찾아온 아픔과 새 출발
김 코치는 “파열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더 움직이지 못하겠더라. 수술을 하면 야구 인생이 끝날까봐 재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삼성이 처음으로 전지훈련을 간 2005년, 따라가서 캐치볼을 했다. 그런데 공 하나를 던지지 못하겠더라. 눈물을 흘리며 30개를 던져봤다. 사령탑에 오른 선동렬 감독을 찾아가 ‘팔이 아파서 도저히 못 던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선 감독은 ‘한국에 가서 치료를 받아라’라고 했다. 그래서 캠프 이틀 만에 혼자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 그리고 수술대에 올랐다”고 아팠던 옛 기억을 털어놨다.
김 코치는 과거를 떠올리다 보니 모교와 얽힌 스토리도 공개했다. 그는 “지도자가 되면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힘든 시간을 보낸 만큼, 내가 받은 도움을 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은퇴 후 ‘맛있는 야구’ 카페를 만들었다. 사회인 야구 포함 야구인들을 돕기 위한 것. 그러다 박진만, 오승환, 박석민 등 선수들 물품을 모아 경매로 팔아 그 돈으로 어려운 친구들을 돕기도 했다. 이제는 카페 활동을 하지 않는다. 지난해 겨울 남은 돈 800만 원에 김 코치가 200만 원을 보태 1000만 원을 모교 대구중학교에 기부했다.
김 코치가 야구 교실 간판을 '몸 편한 야구'로 달은 이유도 현역 시절 아픈 기억들이 있기 때문이다. "고된 운동을 해야하는 데 '몸 편한 야구'라뇨"에 대한 김 코치의 답은 몸이 편해야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다. 건강한 몸을 만들어야 편하구 부드러운 자세로 야구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코치의 야구 교실에 튼튼한 몸을 만들기 위한 웨이트 훈련 등 환경이 잘 갖춰져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 코치는 삼성에서 류중일 전 감독 다음으로 은퇴식을 치르고 현역 생활을 마쳤다. 그리고 은퇴 직후 지도자 생활을 했다. 삼성 1군 불펜 투수코치, 트레이닝 코치 등 후배들을 돕다가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지도자 연수도 받았다. 2017년 류 전 감독이 LG를 맡을 때 부름을 받아 올해까지 LG에서 코치로 지냈고, 더불어 물러났다.
그는 이제는 어린 선수들 육성에 힘쏟기 시작했다. 그의 경험이 무르녹은 야구아카데미가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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