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영화 한 편 같이 보는 게 최고의 데이트 코스였던 세대다. 미팅에서 끌린 첫 상대이든 오래 사귄 애인이든, 개봉관에서 이성과 흥행작 한 편 관람이 가난한 청춘의 통큰 호사였다.
청계천 국도극장 찍고 을지로 명보와 스카라, 서울극장을 지나 종로통으로 진입하면 피카디리와 단성사의 쌍두마차가 있었다. 낙원상가 허리우드와 광화문 국제극장도 걸어서 30분 이내 거리로 기억한다. 매표구 앞에 줄서서 기다리면 암표상들이 말을 걸고, 기다리는 친구에게 연락하려 공중전화를 오갔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인가.
젊었을 때 데이트했던 그녀들의 얼굴과 기억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인데 영화만큼은 머리 속에 또렷히 각인됐다.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플래시 댄스'를 함께 봤던 그가 누구인지, 무서움을 감추느라 온갖 허세를 떨었던 피카디리 '오멘' 첫 상영의 상대가 누구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영화를 어느 여인들과 봤던 건 확실하다. 아내와도 첫 데이트는 서울극장에서 영화 보고 밥 먹기였다. 리들리 스콧의 블록버스터 '블랙호크 다운'에 감동하고 혼자 신나서 떠들었다. 결혼해 애 낳고 살다보니 아내가 가장 싫어하는 영화 장르는 전쟁물이었단다. 부부사이 콩깍지가 벗겨진 후로 '진주만'부터 '덩케르크'까지 전쟁영화는 나홀로 즐겨찾기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부모님 사이에 누워서 흑백TV로 본 KBS의 명화극장들은 시그널 음악만 들어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를 그때 처음 알았고 '로마의 휴일' 오드리 헵번에 홀딱 반했다. 미국 드라마는 '보난자'가 최고였던 시절이다.
단성사를 비롯한 추억의 단관 개봉관들은 벌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CGV, 롯데, 메가박스의 멀티플렉스 트로이카가 스크린 독과점에 관객의 영화 선택권 박탈 등으로 욕 먹던 게 엊그제다. 자기네 값비싼 팝콘만 상영관에서 먹을수 있는 규정을 만들어 혼쭐도 났었다. '국민 점심' 짜장면과 '국민 오락' 영화 관람은 함부로 요금 인상 얘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돌아보면 잘 나가고 돈 잘버니 곧잘 사회적 지탄의 타깃이 됐던거다.
며칠전, 암울한 코로나 국면들어 애용하는 음식 배달앱을 열었다가 CGV와 롯데시네마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티켓링크도 아니고 왠일이래. 핫도그와 팝콘을 배달로 팔고 있었다. '메가플렉스를 이대로 방치하면 정말 다 망하겠구나' 정신이 번쩍 났다. 내 추억들은 다 어디로 가고, 내 아이들은 이제 데이트를 어디서 하란거지?
세월이 변해도 바뀌지 않았으면 바라는 것들이 있다. 영화 '플립'의 그 고목처럼 말이다. 한때는 거대공룡이라고 손가락질했던 멀티플렉스의 생존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으니 이게 또 뭔일인가 싶다./mcgwire@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