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대전 지밀 나인 성가 덕임(이세영 분)이 말했다. “소인은 전하를 연모한 적이 없사옵니다. 한 번도 사내로서 바라본 적이 없사옵니다. 앞으로도 결단코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왕 이산(이준호 분)이 말했다. “날이 밝으면 출궁하거라. 그리고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거라”
참 모래알같은 맹서다. ‘결단코’라니. ‘다시는’이라니. 도무지 마음 속의 사랑은 떠날 기미를 안보이는데 혀에 칼을 박아 난도질하듯 독설을 퍼부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MBC 금토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정조의 첫 번째 후궁 원빈 홍씨(박서경 분)가 졸(卒)했다. 그 오래비이자 도승지인 덕로 홍국영(강훈 분)이 광분한다. 그는 원빈의 죽음에 효의왕후 김씨가 관여했다는 자신의 의심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궁녀들을 납치해 중전을 음해하려했다. 이 과정에서 덕임의 동무인 경희(하율리 분)까지 실종 되고 말았다.
산은 덕로의 만행을 확인했음에도 적절한 청산 시점을 꼽고 있었고 동무의 안위가 걱정된 덕임은 직접 찾아나서며 동무인 복연(이민지 분), 영희(이은샘 분)에게 대비(장희진 분)를 끌어들일 방책을 전한다.
광한궁에 스며들었다가 덕로의 손에 떨어진 덕임이 위기에 처한 순간 내금위를 대동한 산이 등장해 덕로를 잡아들인다.
산은 “네 동무를 구해주겠다”는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고 언제건 정적이 될 수 있는 대비를 끌어들이려 함으로써 자신의 복안을 망가트린 덕임을 추궁하고 덕임은 덕임대로 다 알고있으면서도 정치적 계산 하에 피랍 궁녀들을 방치한 산을 비난한다.
산은 “궁녀 따위가 오만하고 방자하게”라고 일갈하고 덕임은 “전하를 결단코 사내로 바라볼 일 없다”고 대꾸한다. 서상궁(장혜진 분)에게 토로한 대로 “어떻게든 전하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보려고” 모진 말을 뱉은 것이다.
덕임의 시도는 성공했다. 덕임에게만은 군주보다 남자이고 싶었던 산에게 덕임의 말은 피륙이 아닌 폐부에 생채기를 남겼다.
그리하여 출궁시키고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작심한 이산. 청연군주(김이온 분)를 불러 덕임을 보살피라 한 것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염려하지 않으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리고 사냥 나왔다가 행여나 비를 만났을 때 혹시 마주칠까 기대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군주로서 세상일에 어둔 일개 궁녀에게 베푼 배려일 뿐이었다. 그리고 덕임은 그런 산의 배려에 더욱 비참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한껏 성난 종기처럼 바람에만 스쳐도 아픈 자존심이 문제다. 그렇게 끝내 붙들지 못해 떠나보내고 떠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애모의 미련은 차마 뿌리치지 못한 채 일렁이는 촛불이 되어 불현듯 불현듯 솟구쳐 가슴을 덥힌다.
홍덕로가 덕임에게 말했다. “항아님도 한번 계산을 해보았겠지. 대비전을 끌어들인들 전하께서 죽이시진 않으실 것이라고.”
덕임도 말했다. “전하의 계산이 끝나도록 제 동무의 목숨이 살아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노라”고.
홍덕로는 틀렸다. 덕임은 이산 손에 죽을 각오를 한 것이었다. 덕임은 맞았다. 총신 덕로를 팽(烹)하려는 이산의 계산에 덕임의 동무 경희는 없었다.
덕임이 찢은 ‘이모비야(而母婢也)’를 자신의 행위로 만들며 세손시절부터 계산적으로 이산에게 접근한 덕로는 결국 “넌 한번도 내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는 청천벽력같은 왕의 말을 듣고 쫓겨났고 왕의 계산법을 통찰할만큼 영리하지만 안위를 계산치 않고 인간적으로 항거한 덕임은 여전히 이산의 마음을 쥐락펴락한다.
이산으로선 감히 지존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궁녀라서 발칙하고 제 손아귀에 안들어오는 덕임이라서 괘씸하다. “네 옷고름이라도 풀어야겠구나. 한번 승은을 입으면 더 이상 일개 궁녀일순 없게 되지. 승은을 입고도 후궁의 품계를 받지 못한다면 다른 궁녀들의 모멸을 받으며 밥버러지로 썩게 되겠지”라고 곧 후회할 독설이나 내뱉는 것이 고작이다.
화빈(이서 분)전 궁녀로 재입궁한 덕임을 보고 그를 명한 혜경궁 홍씨(강말금 분)를 찾아 항의하던 이산에게 혜경궁은 말한다. “그 아이는 주상께서 행복해 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 부디 행복해지세요”라고.
죽음을 앞두고 남긴 홍덕로의 유서에서 ‘이모비야’ 역시 덕임의 행위임을 알게 된 이산이 심란한 마음에 궐을 거니는 건 새삼스럽지 않다. 뒤늦게 홍덕로의 죽음을 전해 듣고 처연해진 덕임이 궐 한귀퉁이에서 눈물 흘리는 것 역시 그럴만하다. 그리고 그 둘이 만나게 된 건 극적 연출이다.
그 만남에서 이산은 남자이고자 했으나 군주의 위세를 놓지 않았던 이전과 달리 그저 은혜를 고마워하고 그 때문에 사랑만이 더욱 절절해진 남자로서 또 한번의 구애를 했고 덕임 역시 ‘궁녀 성덕임’이란 날선 자존감을 내려놓고 그런 이산을 받아들였다.
그 포옹 속에 ‘결단코’니 ‘다시는’이니 따위 부질없는 결기들은 촛농처럼 녹아내렸다. 현대물에서도 보기 힘든 치열했던 남녀간 밀당이 바야흐로 막을 내렸다. 참으로 조선시대 왕궁의 문제적 남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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