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다큐멘터리 ‘살인을 말하다-테드 번디 테이프’에서 70년대 미국의 가장 유명한 연쇄살인마 테드 번디(본명 시어도어 로버트 번디)는 말한다. “이 사람은 폭력을 통해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허기를 느꼈을 것이다. '다음 번엔 만족할 거야. 다음 번엔 만족할 거야'라며 계속 허기를 느꼈을 것”이라고. 번디를 인터뷰한 기자는 번디가 계속 자신의 범행 얘기를 피하자 ‘3인칭 화법으로 말하기’를 주문해서 이렇게 그의 속내를 끌어냈다.
번디의 말은 스스로는 멈출 수가 없으니 누군가가 멈춰주지 않는다면 범행은 계속됐을 것임을 시사한다. 실제로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남규는 감옥에 갇혀 더 이상 살인을 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를 죽이기도 했다.
29일 방송된 SBS 금토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에서 한준우가 연기한 망치 살인마는 유영철이 모델이다.
극중 송하영(김남길 분)은 망치 살인마의 범행에 제동을 걸기 위해 뒷모습만 찍힌 CCTV 사진만 가지고 공개수배를 내릴 것을 제안했다. 공개수배 전단지의 모습은 다큐멘터리 시리즈 ‘레인코트 킬러 유영철을 추격하다’에서도 발견된다. 당시 유영철은 피해자의 집에서 가져온 겉옷을 입고 있었다.
또한 유영철은 피가 많이 튀는 칼보다 둔기를 선호, 긴 망치의 머리를 장도리 자루에 실리콘으로 연결한 4kg 남짓의 해머를 직접 범행도구로 제작해 어깨걸이 가방에 넣고 다녔다.
둔기 선호 범행 수법은 테드 번디와 닮아 있다. 번디는 문서화된 1974년의 최초의 살인 포함 두건의 초기 살인에서 피해자들을 둔기로 무차별 폭행해 살해했다. 콜로라도 법원 탈출에 이어 콜로라도 교도소에서 두 번째 탈옥에 성공한 후 플로리다에서 벌인 여대생 기숙사 습격에서도 4명의 피해자를 모두 나무몽둥이로 가격해, 이중 2명을 살해했다. 나중에 발견된 유골들도 두개골이 크게 손상된 채 발견돼 그가 둔기를 범행도구로 애용했음을 알려준다.
유영철은 상류층 노인들과 출장 마사지 도우미 등을 범행대상으로 골랐다. 부유층에 대한 적의와 마사지사였던 전처에 대한 증오가 반영됐다.
이에 반해 번디는 젊고 매력적인 여성들을 범행대상으로 골랐다. 번디는 여성을 상품으로 취급, “성적인 부분이 있지만 그런 부분도 소유 같은 더 넓은 사고체계에서만 의미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과장과 거짓말도 공통점이다. 유영철은 자신의 살인에 대해 "학창시절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못 한 제가 희대의 살인마가 될 수 있을까요?"라고 되묻기도 했다고 한다. 번디 역시 “내 배경 중에 살인을 저지를만한 배경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유영철은 중학시절 이미 고등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였고 청소년 시절 절도로 범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번디 역시 매력적인 보이스카웃으로 자신의 소년기를 포장했지만 언어장애로 왕따도 당하고 매듭도 못묶고 성미도 고약해 사람들 겁주기를 좋아했으며 그가 만든 함정속 꼬챙이에 친구가 다리를 찢기기도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또한 둘 모두 가까이 있는 이들이 아닌 불특정 다수를 공격했다. 유영철도 이혼을 요구한 전처가 아닌 다른 이들을 상대로 범행했고 번디도 그가 사귀었던 여인들이나 자신을 아는 사람들에겐 조용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위장했다.
이들이 불특정 다수를 노리는 데는 사냥꾼이란 자의식이 발동하는 모양이다. 번디는 사냥꾼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고 한다. 살인은 증거를 인멸하는 수단이었고 스스로 특별한 일을 했다는 믿음도 있었다고 다큐멘터리는 말하고 있다.
미국에서 수사보고서에 연쇄살인(Serial Murder), 연쇄살인범(Serial Killer)'이란 용어가 쓰인 것은 70년대 FBI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번디 사건도 수사가 진행되며 뒤늦게 쓰인 모양이다. 살인 그 자체를 목적으로 전혀 살해당할 이유가 없는 피해자를 죽이는 사례는 미국에서도 낯선 케이스였다.
번디는 워싱턴, 오리건, 아이다호, 유타, 콜로라도, 플로리다 등 6개주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당시는 전산망도 없던 시대라 각 주간 수사력 공조는 대단히 어려웠다고 한다. 실제 플로리다에서 번디가 잡혔을 때 그는 남의 신분을 도용했고 그가 한때의 동거녀 엘리자베스와 통화를 조건으로 신분을 밝히기 전까지 누구도 그가 테드 번디인지를 몰랐다고 한다.
FBI는 1980년대부터 성적 살인자, 강간범, 아동성범죄자, 납치범 등이 저지르는 범죄의 주요 특징을 식별하는데 주력하면서 프로파일링 기법을 활용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 2월 서울지방경찰청이 과학수사계에 범죄행동분석팀을 설치하면서 본격적인 프로파일러 시대가 열렸다. 현장감식 요원이던 권일용 경위가 '한국 1호 프로파일러'로 발탁됐다. 극중 범죄행동분석팀장 국영수(진선규 분)는 권일용 경위를 ‘프로파일러’로 발탁한 윤외출 당시 경무관을 모델로 했다.
수사관과는 구분되는 이질적인 존재들이 당시 경찰 조직에서 얼마나 배척 받았을 지는 드라마가 잘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는 여타 수사물에서 보여지는 극적인 사건 해결 대신 지루하고 결과없는 실제 수사의 현장을 묵묵히 보여주며 자료 축적을 위해 애썼던 초기 프로파일러들의 노고를 담담히 그려내고 있어 믿음을 준다. 스스로를 멈출 수 없는 연쇄살인마들을 멈추기 위해 공 없는 소리 들어가며 노력하는 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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