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성부(1942-2012) 시인의 시 ‘봄’의 시구처럼, 혹독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시달릴 만큼 시달린 끝에 그래도 어김없이 2022년 봄은 왔고, 프로야구 시즌도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섰다.
KBO 리그가 어느새 4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마흔한 번째 시즌을 맞이했다. 지난 시즌 뒤 구성원 변화가 심했던 10개 구단도 어느덧 선수 재배치를 마무리하고, 구단마다 우승의 부푼 꿈에 한껏 젖어 있을 즈음이다.
프로야구판도 당연히 ‘인연의 세계’다. 이런저런 연(緣)으로 얽히고설켜 있다. 선수들의 학연에는 은근한 정서와 공감대가 스며들어 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사연 한 자락을 들춰보자.
지난해 말, 몸담고 있던 삼성 라이온즈를 떠나 LG 트윈스와 FA 계약을 하고 새 둥지를 튼 ‘준족’ 박해민은 학연을 끈으로 얘깃거리 한 가닥을 남겼다.
박해민이 LG와 계약한 날은 지난해 12월 14일. 계약서에 서명하는 자리에서 박해민은 LG 구단 측에 자못 뜻밖의 부탁을 했다.
차명석 LG 단장에 따르면 박해민이 계약을 마무리 지을 즈음 “(LG 구단에) 우승하러 왔는데 (김)현수 형을 꼭 잡아주셨으면 좋겠다.”고 진지하게 요청했다. 차 단장은 “계약을 하면서 ‘옵션’이나 뭐 그런 것으로 부탁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신일고 선배 얘기를 해서 놀랐다”고 뒷얘기를 전했다.
LG 구단이 반드시 재계약할 작정이었던 김현수와 다시 FA 계약을 성사시킨 것은 박해민과 계약한 뒤 닷새만인 12월 19일이었다.
국가대표 주전 중견수였던 박해민을 영입함으로써 LG 구단은 기동력과 외야 수비력을 한층 더 강화해 1994년 이후 28년 만에 KBO 리그 정상에 설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LG 구단에는 김현수(34)를 비롯해 박해민(32)과 떠오르는 신예 문보경(25) 등 3명의 신일고 출신 선수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미 KBO 리그 최고 교타자로 정평이 나 있는 김현수와 빠른 발과 폭넓은 수비를 자랑하는 박해민은 팀의 주전으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요원이다. 문보경은 지명도야 떨어지지만 지난 시즌 중반부터 1군 무대에 올라온 이후 1, 3루 백업 요원으로 심심치 않게 장타력 생산 능력을 보여준 내야수다.
문보경은 비록 올해도 팀의 구도상 붙박이 주전으로 뛰기는 어려운 상황이긴 하지만 3월 12일 시범경기 첫날 지난해 챔피언 KT 위즈의 마무리 투수 김재윤을 상대로 솔로 홈런 한 방을 날려 존재감을 과시했다. 문보경은 시범경기 통틀어 13게임에 출장, 타격 4위(37타수 13안타)에 올랐고, 팀 내에서는 1위를 기록했다. 표본이 적기는 하지만 이번 시범경기를 통해 그의 성장세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문보경이 LG 구단의 소중한 미래자산임을 새삼 입증한 것이다.
고교 선후배 사이인 김현수와 박해민, 문보경의 다른 공통점은 예전엔 연습생이라고 불리었던 ‘육성선수’ 출신이라는 점이다. 고교 졸업 후 프로구단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듣기에 따라선 좀 모욕적인 신분인 ‘연습생(육성선수라 해도 마찬가지다)’으로 프로에 입문했던 전력을 지니고 있다. 어찌 보면 우회해서 들어온 KBO 리그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나름대로 입지를 다진 김현수와 박해민은 국가대표도 거치면서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두산 베어스에도 이른바 신일고 출신 3인방이 버티고 있다. 토종 에이스 최원준(27)과 든든한 안방 지킴이 박세혁(31)은 서울 수유초등학교와 신일중, 고를 함께 나온 처지이고, 지난해 시즌 도중 LG에서 두산으로 말을 갈아탄, ‘굴러온 복덩이’ 같은 존재였던 양석환(30)은 최원준의 신일고, 동국대 직계 선배이다.
최원준이나 박세혁이 호흡을 같이하며 두산의 방패로 확실한 위치를 잡은 가운데 양석환은 2021시즌에 팀 내 홈런 1위(28개, 전체 7위), 타점 2위(96타점, 전체 8위)로 잠재력을 폭발시키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 두산의 핵심타자로 거듭났다. 양석환은 아쉽게도 봄철 캠프 도중 옆구리를 다쳐 시범경기에는 제대로 뛰지 못했다. 양석환이 빠진 두산 타선은 중량감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그가 언제 복귀할 수 있는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LG와 두산은 그동안 서울지역 고교 우수 선수를 놓고 치열한 인재 쟁탈전을 벌여왔다. 특히 1986년 두산(전신 OB 베어스)이 연고지를 대전에서 서울로 옮김에 따라 ‘한 지붕’을 쓰는 라이벌 관계로 신인 선수 드래프트 때도 동전 던지기, 주사위 굴리기 같은 전근대적인 방법까지 써가면서 신경전을 끊임없이 펼쳐온 사이였다.
이런 와중에 두산은 신일고 출신인 김태형 감독이 2015년부터 지휘봉을 잡은 뒤 3차례 우승, 7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2015~2021년)이라는 혁혁한 공로를 세운 데 반해 LG는 어찌 보면 두산의 벽에 가로막혀 1994년 이후 여태껏 우승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LG는 특히 2015년에 두산과 상대 전적 8승 8패로 균형을 맞춰본 뒤 2016년부터 2021년까지 두산에 줄곧 뒤처져 ‘적자 기조’를 단 한 해도 바꾸지 못했다. 두산의 전력이 극강이었던 2018년에는 무려 15패를 당했고 승리는 고작 한 게임뿐이었을 정도로 밀렸고, 지난 시즌에도 플레이오프에서 두산에 덜미를 잡혀 한국시리즈 도약이 좌절됐다.
절치부심한 LG는 올해 박해민을 새로 영입하고 이미 리그 최강으로 평가받는 견실한 마운드의 힘을 바탕삼아 정상 탈환을 노리고 있다. 그 선봉에 박해민과 김현수, 그리고 문보경이 서 있다. LG가 두산을 뛰어넘어 염원의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이룰 수 있을지. ‘예리한 창 김현수, 박해민, 문보경 등이 두산의 견고한 방패로 상징되는 최원준과 박세혁, 그리고 양석환과의 공방전을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전망인지도 모르겠다.
글. 홍윤표 OSEN 고문